LG경제연구원 '정책 불확실성이 미국경제 회복 짓누른다'
미국이 세계경제 회복을 주도하며 출구전략의 문턱에 서 있지만, 재정 및 통화정책의 불확실성은 쉽사리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경기회복 흐름의 유지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경제전반의 생산성 혁신과 고용창출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정책불확실성 해소가 긴요해 보인다.
9월 연준 자산매입 규모 축소(Tapering)가 무산되고,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차기 연준 이사회 의장을 맡을 뜻이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현재 총 16조6,990억 달러에 이르는 연방정부의 총 부채 한도를 추가적으로 더 늘리기 위한 의회협상의 마감시한을 약 2주 앞둔 미국경제는 여전히 정책 불확실성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9월 초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전미기업경제학회(National Association for Business Economics: NABE)의 연례회의가 열렸다. 미국 내 비금융기업의 경제분석 담당자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이 컨퍼런스에서는 미국 학계와 산업계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들과 전, 현직 정책당국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자리다. 특히 월 가(Wall Street)로 대표되는 금융산업계 중심의 시각보다는 실물경제 부문(Main Street)의 관점에서 미국경제를 조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장이라 할 수 있다. 참석자들은 현재 미국이 안고 있는 경제정책의 불확실성에 높은 관심과 공감을 나타냈다. 2012년 이후 미국경제의 완연한 회복세가 이어지고 있음을 대체로 낙관하면서도 재정 및 통화정책 변화의 속도와 폭에 관해서는 여전히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미국경제에서 제기되고 있는 몇 가지 이슈들을 이 컨퍼런스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보다 신중한 통화정책 변화 필요” 목소리 높아
연준의 통화정책 변화, 즉 출구전략의 시행에 있어서는 대체로 보다 신중하고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시각이 다수였다. 주요 패널리스트 대상의 설문조사에 기반한 경제전망(NABE Outlook Sept 2013)에 따르면, 연준이 올해 안에 자산매입 규모를 줄일 가능성은 45% 가량으로 절반에 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2014년이 되어서야 테이퍼링이 시작될 확률을 80%로 내다봤다. 조사 및 발표 시점이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열리기 이전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뭇 인상적인 조사결과라고 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월 가를 중심으로 하는 금융회사 소속의 경제 및 정책분석가들을 대상으로 행한 여러 조사들에서는 올해 9월 테이퍼링 시작 가능성이 대부분 절반을 상회했다. 경기흐름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금융산업계는 최근 미국 주식시장의 호조세를 보다 민감하게 반영한 결과일 개연성이 높다. 반면 컨퍼런스에 참석한 일반 기업들의 경우 고용과 생산, 판매 등 국민이 체감하는 일상적인 실물경제활동에 좀더 가까운 경기인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전망도 하반기 들어 소폭 하향 조정되고 있다. NABE 패널리스트들은 올해 미국의 경제성장률을 지난 5월 조사 때의 2.4%에서 1.9%로 하향 조정했다. 9월 FOMC에서 현재의 자산매입 프로그램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연준 정책위원들이 제시한 성장률 범위 2.0~2.3%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상업용 부동산을 비롯한 비주거용구조물 투자와 민간소비의 둔화가 성장전망 하향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가 낳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나왔다. 존 윌리엄스 샌프란시스코 연방은행 총재는 자산시장의 버블을 언급했다. 미래 자산수익에 대한 기대값이 형성될 때 현재 방향이나 가격흐름이 종종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데, 많은 경우 낙관과 비관이 극단적으로 양분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낙관적 상황이 미래에 대한 과도한 낙관적 기대를 형성하고, 종종 자산시장의 비이성적 과열 및 붕괴로 귀결된다. 지역 연방은행 총재의 이 같은 발언은 세간에 불거지고 있는 미국 주식시장의 버블 논란에 투영된 향후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가 이미 과도한 영역으로 접어들고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반대로 해석하면 장래 미국경제 회복속도가 현재 주식 및 부동산 가격, 채권금리의 상승을 통해 나타나는 정도에 미치지 못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책 불확실성’이 경제예측의 Key issue로 대두
연준의 통화정책 변화를 비롯해 컨퍼런스 참여자들이 공유한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는 바로 미국경제가 안고 있는 ‘정책 불확실성’이었다. 경제정책의 불확실성은 기본적으로 경제상황의 불확실성으로부터 기인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경제여건을 둘러싼 불확실성은 글로벌 경제위기 발생 초기에 비해 현저한 정도로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재정 및 통화정책의 불확실성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거듭된 양적 완화 정책의 종료 및 재개를 비롯해 2011년 S&P에 의한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강등과 재정절벽으로 불리는 정부예산 자동 삭감(Sequester) 시행, 최근의 버냉키 쇼크에 이르기까지 미국경제의 흐름을 결정하는 데 있어 정책변수의 영향력이 유난히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정책 불확실성의 크기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지수로도 잘 나타난다. 스탠포드대의 스콧 베이커와 니콜라스 블룸, 시카고 경영대의 스티브 데이비스는 이번 컨퍼런스를 통해 ‘경제정책불확실성지수(Economic Policy Uncertainty Index)’를 소개했다. 이는 언론기사에 등장하는 ‘불확실성’ 단어의 빈도 수와 연방정부 지출의 계획과 실행 규모의 불일치, 연준에 의한 물가전망의 불일치 정도, 과세항목의 일몰삭제 건수 등에 기반해 경제정책의 불확실성 정도를 지수 형태로 산출한 것이다.
이 지수의 1985년 이후 장기 추이를 보면, 1987년 발생한 블랙 먼데이를 비롯 2001년의 9.11 테러, 1991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친 걸프전, 그리고 리먼 사태와 유로존 위기 같은 역사적 격변이 발생했을 때마다 크게 상승하는 움직임을 나타냈다. 경제정책과 보다 직접적인 연관을 지닌 주요 사건으로는 1980년대 후반 ‘균형예산법(Gramm-Rudman Balanced-Budget Amendment)’의 제정 및 초기 도입시기를 비롯해 클린턴, 부시 등이 당선된 각 대선 때마다 경제정책에 관한 불확실성이 증폭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이후로는 2008년 단행된 연방기금금리의 대폭 인하 및 대규모 경기부양예산 편성, 금융기관에 대한 구제금융(TARP), 재정절벽 등 경제정책에 관한 이슈들이 불거질 때마다 지수가 급격히 상승했으며, 지수의 전반적인 수준도 과거에 비해 높아져 있다.
올 들어 지난 8월까지는 불확실성 지수(월간 기준)가 빠르게 하락했는데, 이는 지난 해 말부터 정부예산의 자동삭감(Sequester)이 실행에 옮겨지면서 재정정책의 불확실성이 오히려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버냉키 쇼크’ 같은 다소간의 혼란을 동반하긴 했지만, 연준이 머지 않은 미래에 출구전략을 시작할 것이라는 예상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점도 불확실성의 감소추세에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골드만삭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얀 하치우스는 올해 말과 내년 미국경제 전망에서 “시중금리 상승으로 금융여건이 다소 타이트해지더라도 경제정책의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민간 경제활동의 개선추세는 이어질 것”으로 밝혔다.
하지만 정책 불확실성 축소에 대한 이 같은 기대가 9월 들어서는 다소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위기 이후 시행돼 온 제로금리와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경제여건의 개선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되돌리려는 시기가 연준의장의 임기만료 및 사상 초유의 과반 정책위원에 대한 교체시기와 묘하게 맞물렸다. 위기 발생 이후 5년여만에 정책전환의 출구 앞에 선 연준이 첫 발걸음을 떼지 못해 머뭇거리는 동안 의회에서는 지난 2011년에 이어 또다시 연방부채 한도 증액 문제가 2014회계연도 연방재정지출에 대한 승인여부와 결부돼 다시금 불안요인으로 대두되고 있다. 하원에서 다수의석을 점하고 있는 공화당이 부채한도 증액의 전제조건으로 내년도 재정지출의 대폭 삭감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오바마 대통령은 흔히 ‘오바마 케어’로 불리는 ‘환자보호 및 적정부담보험법(Patient Protection and Affordable Care Act: PPACA)’의 도입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월별지표와는 별도로 제공하는 일간 불확실성 지표는 9월 들어 상승압력을 받으며 요동하는 조짐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지금 치열한 생산성 논쟁 중
미국경제의 장기적인 생산성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도 뜨거웠다. 메사추세츠공대(MIT)의 에릭 브린욜프슨은 향후 10년 가량을 빅 데이터와 로보틱스, 인공지능 등 일련의 기술혁신이 지속적으로 현실화되는 시기로 규정한다. 애플의 음성인식서비스인 시리(Siri)나 리씽킹 로보틱스(Rethinking Robotics)사의 휴머노이드 로봇 박스터(Boxter), 구글의 무인자동차 등은 IT가 인접기술에 융합하고 스며들면서, 초기 발달단계에서는 구현하기 힘들었던 기능과 작업수행능력을 현실에서 가능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사례들이다. 또 IT의 이러한 적용과정은 수많은 사용자들의 연결로부터 만들어지는 빅 데이터에 기반한 피드백을 통해 오류를 수정하고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혁신의 결과물들이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개인이나 기업이 충분히 지불 가능한 가격에 제공됨으로써 노동력의 소모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가 앞으로는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가 지적하는 문제는 엄청난 혁신이 야기할 부정적 효과이다. 기계가, 컴퓨터가 사람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의 고용률이 정체되는 현상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IT를 중심으로 생산과 서비스의 혁신이 가속화되는 경우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 결과 개인의 삶이 윤택해지는 동시에 근로와 소득의 기회를 상실하는 측면 모두가 뚜렷이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로봇에 의한 인간 노동력의 대체가 더 이상 제조업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박스터를 만든 스콧 에케튼 리씽크 로보틱스 CEO는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만들거나 의류매장에서 티셔츠를 접는 로봇의 상용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소개한다. 브린욜프슨에 따르면 정책담당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무는 기술혁신이 야기할 이러한 경제 및 사회체제의 와해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인간과 컴퓨터가 공존하며 함께 일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일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반면 노스웨스턴대의 로버트 고든은 IT를 주축으로 한 기술혁신이 미국경제 전반에 걸친 생산성 증가로까지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는 이미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의 노동생산성이 저하되기 시작했으며, 글로벌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그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고 강조한다. 최근까지 장기실업률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는 자연실업률 수준의 상승이 자리잡고 있으며, 2007년 2.5% 내외로 추산한 미국경제의 잠재성장률도 위기시기를 거쳐 최근에는 1.5%로 하락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산출량의 증가나 노동생산성증가율의 상승은 투입시간의 증가나 경기변동의 결과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장기적 관점에서 미국경제에 혜택을 준 세 차례 기술혁명을 거론하면서 18세기 후반의 증기기관과 철도, 19세기 말의 전기 및 내연기관 시대와 비교해 20세기 후반의 컴퓨터 및 인터넷 혁명이 미국경제의 생산성 증가 효과는 그리 높지 않은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과거 첫 번째와 두 번째 산업혁명이 경제 전체의 산출 수준과 생산성을 끌어올린 이면에는 인간의 수명 증가와 노동인구 확대, 교육기회 확대 및 문맹 감소 같은 변화도 동반됐다. 인구변화와 같은 요인들이 앞으로는 과거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한다. 고든이 추정한 1891~2007년 사이 미국의 생산성증가율은 연 2.2%였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25~40년간 생산성 증가속도는 연 1.3%에 그칠 것으로 추산한다. 기술혁신이 멈추거나 생산성 증가에 완전히 무용할 것으로 내다보지는 않지만, 이미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 효과가 반감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속성장 허들 넘을 수 있을지에 주목
최근 들어 미국이 세계경제의 성장과 회복을 견인하는 흐름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예상치 못한 위기가 발생할 위험(Tail Risk)은 현저히 줄어든 것으로 판단된다. 컨퍼런스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앞으로 최소 1~2년간은 경제성장률이 점진적으로 높아지면서 강한 달러, 강한 미국경제가 세계경제를 주도할 것이라는 비교적 낙관적인 분위기와 자신감도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고민하는 미국경제의 이면에는 안정적 성장의 기반이 되는 정책환경이 아직 정착되어 있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도 자리잡고 있었다. 쉽사리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높은 장기실업률 수준과 자산버블에 대한 우려 등 정책실패 또는 정책의 무력함에 대한 소리 없는 질타도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곧바로 실시, 발표된 서베이 자료에는 자신이 속한 기업의 매출이나 영업활동의 신장이 경제의 전체의 성장속도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묻어났다.
고든은 미국경제의 장기 성장추세와 생산성을 어둡게 전망했다. 기술혁신의 성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은 이미 크지 않다고 평가절하했다. 브린욜프슨은 기술혁신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결과로서 일자리 감소 등 더 큰 도전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빅 데이터를 활용해 유, 무형의 관리비용을 크게 절감한 사례를 비롯해, IT를 통한 거듭된 혁신을 바야흐로 경제 전반의 생산성 증대로 이끌어내려는 정보경제학 및 경영정보학 분야의 고민과 응전은 치열했다. 일반적으로 미국경제는 새로운 기술과 혁신을 가장 빠르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시장화, 산업화해내는 토양과 역량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기술혁신이 생산성을 높이고 동시에 미국 내에서 창조적 및 고숙련 일자리를 새로이 만들어낸다면 미국경제의 중장기적인 전망도 조금은 밝아질 수 있을 듯하다. 정책 불확실성이 이러한 선순환을 가로막지 않도록 주의와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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