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LGERI의 미래생각(2) 위기 후 세계경제의 뉴 패러다임'
'LGERI의 미래생각' 연재 2회인 이 글에서는 다가올 10년 동안 세계경제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나갈 것인지를 짚어 본다.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힘과 그 작동 메커니즘이 어느 방향으로 변할 것인지, 또 그런 변화가 경제주체들, 특히 기업의 미래 비즈니스에 어떤 파급효과를 줄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번 글의 목적이다. 다음 10년 동안 세계경제의 패러다임은 위기 이전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 21세기적 상황에 걸맞는 새로운 균형을 모색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거대한 힘의 이동, 국가와 시장의 역할에 대한 재정의, 글로벌화를 둘러싼 새로운 흐름 등이 나타나면서 기업을 비롯한 경제주체들에게 다양한 성공과 실패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다음 회(LG BI 1078호, 2월 3일자)에는 '2020년 글로벌 고령시대의 빛과 그림자' 가 게재될 예정이다.
1. 위기를 넘어서 21세기로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Thomas Kuhn)은 패러다임을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이론·관습·사고·관념·가치관 등이 결합된 총체적인 틀 또는 개념의 집합체로 정의하였다. 특정시기의 패러다임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과학적 발견이나 현상으로 드러난 사실에 의해 부정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대체된다. 때문에 패러다임은 생성, 발전, 쇠퇴, 대체와 같은 변화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두산백과사전 Encyber 참조).
가깝게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드러난 세계경제의 취약성을 극복하며, 멀리는 21세기 세계경제의 중장기 지속성장(Sustainable growth)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열망이 최근 G2, G8, G20 등 다양한 수준의 국제협의 채널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개별 국가차원의 명시적, 또는 암묵적 정책기조 변화도 다양한 방면에서 감지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세계경제를 벼랑으로 몰고 간 이번 위기를 거치면서 경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혹은 신념이 위기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다. 다음 10년 동안에는 그런 생각과 신념의 변화가 응집되면서 세계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예상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경제주체들이 공감하지만 개별 국가의 내부에서, 그리고 세계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국가들 사이에도 의견의 불일치나 이해관계의 중대한 충돌로 인한 불협화음과 마찰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다가올 10년 동안 개인과 기업 등 핵심 경제주체들이 주목해야 할 세계경제의 패러다임 변화 문제를 크게 21세기 글로벌 경제의 세력중심 이동, 국가와 시장의 새로운 관계 설정, 글로벌화의 진화 방향 등의 관점에서 조망해 본다.
2. 세계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전세계 많은 개인과 가계, 그리고 기업과 국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90년대 초반 구소연방 붕괴 이후 근 20년 가까이 고성장을 지속해 온 세계경제가 일부 지역이나 국가 차원이 아닌, 전지구적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스템 붕괴 위기에 봉착하는 대공황 이후 초유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선진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많은 개인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가계가 보유하고 있던 천문학적인 금융 및 실물 자산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위기로 인한 미국 가계의 순자산 손실은 2008년 한 해 동안에만 총 11조 달러(FRB 추산)에 달했으며, 미국과 EU의 실업률이 전후 최고수준인 10% 안팎으로 치솟았다. 여기에다 수많은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문을 닫았거나 인수합병되는 운명에 처했다. 국가 차원에서도 혁신적인 성장모델로 칭송되던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두바이 등 일부 국가들이 하루아침에 국가부도의 위기에 몰리는 극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위기의 파고에서 살아남은 국가나 기업 등 경제주체들 역시 이번 위기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한 처방을 찾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지난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장기 고성장 국면을 지탱해 왔던 세계경제의 기본 패러다임에 무슨 결함이 있었는지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새로운 미래를 위한 대안 모색이 불가피한 시점에 이른 것이다.
사실 2008년의 금융위기가 아니더라도 세계경제의 과거 패러다임은 이미 여러 방향에서 중대 도전을 맞고 있던 상황이었다. 중국, 인도 등 신흥경제권의 빠른 성장과 비중 확대, 미국의 대규모 재정, 무역 적자와 달러화에 대한 신뢰 저하, 여기에다 세계경제가 장기간 고성장을 지속해 온 데 따른 여러 부작용, 그 중에서도 특히 양극화 문제와 지구환경 파괴, 그리고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에너지자원 고갈과 글로벌 온실가스 규제 확산 등과 같은 21세기적 현안들이 지난 10년동안 동시다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과 서방국가’ 중심의 기존 세계경제 질서, 그리고 이들이 확산시켜 온 ‘글로벌 스탠더드’에 기초한 ‘경제 자유화’ 및 ‘글로벌화’ 드라이브 등을 골자로 하는 기존의 세계경제 패러다임으로 제대로 담아내거나 해결의 방안을 제시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지난 20세기적인 생각이나 신념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이 누적되면서, 21세기적 상황에 맞는 세계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필요성이 위기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세계경제가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대한 변화의 모멘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기를 계기로 미국, 경제 자유화, 글로벌화 등 지금까지 세계경제를 떠받쳐 오던 몇 개의 큰 기둥들이 일부는 허물어지고, 또 일부는 큰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리먼쇼크 후부터 최근까지 1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계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힘의 중심이 미국과 서방국가들에서 중국, 인도 등 신흥경제권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징후가 더욱 분명해졌고, 자국의 경제 및 금융 시스템 안정과 지속가능성을 책임지는 세계 각국 정책당국자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국가와 시장, 정부와 민간의 역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변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 특히 자신의 일자리와 소득, 보유자산 가치, 연금 등과 같은 구체적인 경제 문제, 특히 먹고사는 문제를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신념이 금번 위기를 거치면서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다.
3. 미국과 중국 사이의 힘의 이동
먼저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중국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다음 10년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힘의 교체가 본격화되는 시기가 될 것이며, 그 이후, 즉 2020년대에는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마침내 세계 최대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경제예측기관 글로벌 인사이트(Global Insight)의 최근 전망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1/3 수준을 기록한 중국의 GDP(경상기준)는 2023년 미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서고, 2030년에는 중국의 GDP가 미국의 1.5배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개혁개방 초기인 지난 1990년 당시 중국의 GDP가 미국의 6%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다 중국, 인도, 브라질 등을 포함한 신흥시장경제(Emerging markets)와 선진경제권(Advanced economies) 사이의 격차도 다음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2030년 이전에 전자의 GDP 합이 후자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다음 10년은 중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으로 대표되는 신흥시장경제와 미국이 중심이 된 선진경제권 사이의 힘겨루기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10년이 될 것이다. 기존의 경제 파워를 유지하려는 미국 등 선진국들의 마지막 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신흥경제권이 지난 18세기 말 산업혁명 이후 수 세기만에 처음으로 세계경제의 주도권에 바짝 다가서는 세기사적 장면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세계경제의 무대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신흥경제권의 발언권은 지난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등 서방선진국들의 영향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경제규모(GDP)로 대표되는 현실적인 힘의 저울은 중국과 신흥경제권 쪽으로 점차 기울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 글로벌 통상, 금융, 자원, 환경, 노동, 기술표준 등 21세기 미래의 세계경제 질서를 자신에게 보다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한 미국과 중국, 서방선진국과 신흥경제권 사이의 갈등과 마찰, 그리고 서로의 이익을 위한 타협과 봉합의 노력도 다각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질서의 재편 과정이 얼마나 순조로울지는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다음 10년 동안 미국과 중국, 그 어느 쪽도 세계경제의 질서 재편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기 어려운 힘의 진공 상태가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 가장 큰 리스크 요인이다.
세계경제 전반에 무질서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매 사안 마다 적나라한 힘의 논리가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런 불안정한 상태가 자칫 2008년 위기에 버금가는 또 다른 중대파국을 불러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G20 등을 통한 글로벌 수준의 공조 및 협의체가 제대로 기능을 수행할 경우, 특히 미국과 중국이 전략적인 대화를 통해 상호이익과 공존을 심도 있게 모색해 나갈 경우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세계경제 주도권의 재편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중국이 많은 개도국들에게 한 나라의 경제성장과 국가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롤 모델(Role model)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2008년의 위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국가주도 경제성장(State capitalism) 모델에 대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후발개도국들의 관심이 점차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 성장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조급증과 더불어 국가차원의 시스템 위기 방어에 많은 관심을 가진 개도국의 정책담당자들이 정치적 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국가가 성장계획을 주도하고 자원배분을 관리 및 통제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이 성장 효율 측면에서나 위기 방어 측면에서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예상대로 향후 10년 동안 중국의 실질적인 경제력이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갈 경우, 지난 1990년대 세계은행과 IMF 등 미국의 워싱턴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국제금융기구들이 경제개혁 및 성장 처방으로 개도국들에게 권고했던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의 영향력이 상당 부분 퇴색하고 이를 대체하는 일종의 대안으로 중국식 국가주도 성장모델, 혹은 ‘베이징 컨센서스(Beijing Consensus)’가 많은 후발개도국들 사이에 상대적으로 더 조명 받을 것으로 보인다(앞페이지 <박스> 참조). 경제성장의 방식을 둘러싼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민간부문의 자율과 창의를 꾸준히 확장시켜 왔던 지금까지의 세계경제 발전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일정 부분 퇴행적인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옳고 그르냐의 여부와 무관하게, 후발개도국들 사이에서는 다음 10년 동안 세계경제의 실질적인 힘의 이동을 반영하는 주목할 만한 흐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4. 국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생각
경제 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 확대 및 강화 흐름은 비단 후발개도국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서방선진국에서도 이미 가시화되었다. 투자은행 등 부실화된 금융기관과 개별 산업 및 기업에 대한 정부의 직접지원이 많은 나라에서 위기극복 방안의 일환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민간소비 위축을 대신하는 정부소비의 증가로 정부재정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 1~2년 사이 급등하는 양상을 보였고, 녹색산업, IT, 교육 등 미래 전략부문에 대한 정부 지원도 크게 늘어났다. 공적자금을 투입한 은행 등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의 경영 감독 및 금융시스템 규제 강화도 글로벌한 현상이다.
눈앞에 닥친 경제 및 금융 시스템 붕괴 조짐을 막고 잠복해 있는 추가적 리스크를 제거해 경제 전체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한편, 국민 다수의 일자리와 소득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면 국가가 시장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규율을 강화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 용인되고 있다. 그러나 향후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의 여진이 사라지고 성장과 소득, 일자리가 과거의 정상적인 국면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서는 시점이 오면, 국가와 시장, 정부와 민간의 관계는 원상회복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소위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통해 정부 재정수지는 대규모 적자에서 다시 균형을 향해 움직여 나갈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위기 직후 높아진 각종 세율이 다시 하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이 들어간 개별 금융기관이나 기업의 경영이 정상화될 경우 이들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나 감독도 과거의 통상적인 수준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과도한 리스크 감수 행동(Risk-taking)을 막기 위해 금융기관 임직원의 보수를 일정수준으로 제한하는 일도 상황에 따라 유야무야될 수 있다. 무엇보다 ‘큰 정부’의 비효율 문제가 부상하면서 경제성장의 걸림돌로 지목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국가와 시장, 정부와 민간의 관계는 다시 위기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위기의 발단과 진행 및 극복과정에서 남겨진 교훈은 제어되지 않은 과도한 시장 자율과 정부의 규제감독 기능의 지나친 약화가 국가 경제시스템 전체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중대 리스크 요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감독은 개별 국가차원에서, 그리고 글로벌 공조 차원에서 크게 강화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실물 부문에 투영된 금융의 의미와 성장에 대한 기여도는 위기 이전에 비해 상당히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단 한번 커진 정부의 기능과 역할은 그 관성 상 다시 줄어들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최근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미래 전략산업 지원책이나 글로벌 차원의 온실가스 규제 대응 등과 같은 부문에서 정부의 역할은 향후에도 계속 확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자국 산업의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될 전략산업에 대해서는 R&D 지원, 정부 구매, 외국기업에 대한 진입 제한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한 과감하고 공세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위기 이후 크게 증가한 실업자 및 빈곤층에 대한 정부의 교육훈련, 의료혜택, 주거복지, 실업급여 지원 등 사회안전망 강화 노력은 정부의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의 생각을 위기 이전과는 크게 다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생각해 볼 문제다. 위기 국면 동안 취약 계층의 일자리와 소득 등에 가해진 충격은 향후 경기가 다시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장기 구조적인 문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시장이 풀지 못하는 문제는 결국 정부가 개입해서 풀수 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시대의 큰 흐름과 더불어 큰 정부와 작은 정부 사이를 오가는 패러다임의 추는 2008년 위기를 맞아 작은 정부에서 큰 정부 쪽으로 급속히 옮아갔지만, 다시 작은 정부로 복귀하는 속도는 예상외로 크게 더딜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나라마다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고 개별 국가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과 상황에 따른 별도의 타협과 모색이 이루어질 것이나, 전세계적으로 다음 10년 동안은 큰 정부 쪽에 무게중심이 좀 더 기울어진 모습이 될 것이다.
5. 난기류에 휩싸인 글로벌화
글로벌화(Globalization) 흐름은 작은 정부(혹은 경제 자유화) 추세와 더불어 위기 이전 세계경제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국경을 초월한 상품과 서비스, 노동력,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현실화되면서 전세계 많은 저개발국의 절대빈곤 해소와 선후진 각국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 기업의 시장 확대와 비즈니스 혁신, 그리고 소비자 후생의 획기적인 증가 등이 가능해졌다. 특히 지난 1995년 국제무역기구(WTO) 창설 이후 글로벌화 흐름에 본격적으로 동참한 중국과 인도 등은 글로벌화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러나 지난 20여년 동안 세계경제의 성장에 크게 기여해 온 글로벌화의 흐름에도 위기 이후 일정한 이상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각국 외교통상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차지했던 FTA 체결 움직임도 일단 제동이 걸린 상태이다. 한미 FTA가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아직은 어떤 나라도 보호무역으로의 회귀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자국의 산업보호, 근로자의 일자리와 소득 유지를 위해서라면 상품, 자본, 노동의 국제간 흐름에 과거와는 다른 접근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점점 늘고 있다. 먼저 무역 관련 사안으로는 주요 공산품에 대한 보복관세 부과 등 통상마찰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위기 이후 주목받고 있는 미국의 Buy American과 중국의 자국산 하이테크 제품 우선 구매 조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9년 2월 경기부양 법안에서 철강제품 등에 대한 Buy American 조항 도입을 시도했던 미국의 경우 최근 의회의 2,000억달러 규모의 일자리 창출 법안에서 다시 이 조항을 강화, 신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한 중국 정부는 2009년 10월 정부 기관이 하이테크 제품을 구매할 경우 자국내 지적재산권을 보유한 제품에 대해 우선권을 부여하도록 했다. 미국과 중국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지만 글로벌 무역의 양대 축을 맡고 있는 이 두 나라가 특정 상품군에 대해 외국기업을 사실상 차별대우하려는 의도를 실제 갖고 있거나, 향후 구체화시켜 나갈 경우 글로벌 무역 전반에 예측불허의 파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외에도 최근 미국과 EU에 이어 중국이 각각 반독점법의 역외 적용을 명시하면서 선진국과 개도국을 가리지 않고 외국기업의 자국 또는 역내 활동에 대한 장벽을 높여 나가는 추세다. 2009년 5월 EU가 미국의 인텔에 대해 불공정 거래를 이유로 거액의 과징금(10억 6천만 유로)을 부과했고, 중국 정부는 지난해 3월 반독점을 이유로 코카콜라의 중국 음료업체 후이위엔(Huiyuan) 인수를 무산시킨 바 있다. 특허나 기술 관련 장벽도 높아지고 있다. WTO가 집계한 무역기술장벽(Technical Barriers to Trade agreement) 건수는 2005년 771건에서 2008년 1,251건, 그리고 2009년 3분기 현재 1,500건으로 늘어났다.
물론 공정거래 이슈나 특허 장벽과 관련한 이런 최근의 흐름이 반드시 반글로벌화 흐름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가까운 장래에 자국의 정치사회적 요구를 만족시킬 만한 일자리, 소득 등의 가시적인 개선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많은 나라의 정부들이 보호주의에 경도되는 양상을 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경제적 합리성의 문제와는 별개로 자국의 일자리와 소득 창출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외국기업의 국내 활동, 그리고 국내의 일자리와 소득을 해외로 이전시키는 자국기업의 해외투자를 바라보는 정부와 국민의 눈길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3월 프랑스 정부는 르노자동차에 대해 특정 모델의 해외(슬로베니아) 생산을 동결하고 대신 국내생산을 확대하라고 권고했다가 EU 반독점 당국의 강력한 경고를 받고 철회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금융의 글로벌화 문제도 짚어보아야 할 부분이다. 2008년 위기 이후 글로벌 유동성이 급격히 줄어든 데다 실물경기의 전반적인 부진 지속, 금융부문에 대한 글로벌 차원의 규제와 감독 강화 등으로 향후 상당기간 글로벌 자본이동, 특히 해외직접투자(FDI)는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여 년간 개도국의 고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해 온 선진국의 투자자금이 위기 이후 자국회귀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LGBI> 2009년 8월 5일자,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을 헤쳐나가려면‘ 제하의 글을 참조), 개도국들에 대한 투자도 베트남, 브라질 등 소수 유망국가나 유망산업을 중심으로 한 선택과 집중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앞으로 얼마동안 지속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글로벌 유동성의 흐름과 해외직접투자의 위축을 유발한 요인들은 단시간 내 원상회복되기 어려운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풍부하고 값싼 유동성, 국제간 대규모 M&A 거래, 각종 자산시장의 급성장 등과 같은 위기 이전의 금융 글로벌화 흐름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6. 패러다임 변화와 기업 비즈니스
다가올 10년 동안 세계경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 움직여 나갈 것이다. 다양한 모색과 시도를 통한 순조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질수도 있지만, 지금 예측하기 어려운 충격과 혼란이 발생하면서 세계경제를 혼돈 속으로 몰아갈 가능성도 있다. 특히 중국과 미국 사이의 힘의 이동, 정부의 역할 확대, 글로벌화의 불투명한 전도 등은 글로벌 기업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기존의 사업환경과 비즈니스 전략에 중대 교란 또는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다.
기업들은 먼저 글로벌 시장의 중심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그 추세와 방향을 예의주시하고 적기 대응할 필요가 있다. 패러다임 전환의 대격변 시기가 될 다음 10년 동안에는 글로벌 시장의 비즈니스 환경변화를 조기에 정확하게 포착하는 감수성이 비즈니스 성공여부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경제상황이 어려울수록 현지 정부와 소비자, 그리고 로컬 기업들의 글로벌 기업에 대한 정서(sentiment)는 비우호적이고 공격적인 양상을 띨 것이다. 그만큼 글로벌 비즈니스에 수반되는 제반 리스크와 관련 비용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고객의 기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닌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물론, 일자리와 소득을 중시하는 현지 정부와 국민들의 니즈, 그리고 지역사회의 성장과 발전 기대에 장기적으로 부응하는 글로벌 기업만이 다음 10년의 대격변기 동안에도 지속적인 성장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끝>
'LGERI의 미래생각' 연재 2회인 이 글에서는 다가올 10년 동안 세계경제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나갈 것인지를 짚어 본다.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힘과 그 작동 메커니즘이 어느 방향으로 변할 것인지, 또 그런 변화가 경제주체들, 특히 기업의 미래 비즈니스에 어떤 파급효과를 줄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번 글의 목적이다. 다음 10년 동안 세계경제의 패러다임은 위기 이전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 21세기적 상황에 걸맞는 새로운 균형을 모색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거대한 힘의 이동, 국가와 시장의 역할에 대한 재정의, 글로벌화를 둘러싼 새로운 흐름 등이 나타나면서 기업을 비롯한 경제주체들에게 다양한 성공과 실패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다음 회(LG BI 1078호, 2월 3일자)에는 '2020년 글로벌 고령시대의 빛과 그림자' 가 게재될 예정이다.
1. 위기를 넘어서 21세기로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Thomas Kuhn)은 패러다임을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이론·관습·사고·관념·가치관 등이 결합된 총체적인 틀 또는 개념의 집합체로 정의하였다. 특정시기의 패러다임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과학적 발견이나 현상으로 드러난 사실에 의해 부정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대체된다. 때문에 패러다임은 생성, 발전, 쇠퇴, 대체와 같은 변화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두산백과사전 Encyber 참조).
가깝게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드러난 세계경제의 취약성을 극복하며, 멀리는 21세기 세계경제의 중장기 지속성장(Sustainable growth)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열망이 최근 G2, G8, G20 등 다양한 수준의 국제협의 채널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개별 국가차원의 명시적, 또는 암묵적 정책기조 변화도 다양한 방면에서 감지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세계경제를 벼랑으로 몰고 간 이번 위기를 거치면서 경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 혹은 신념이 위기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다. 다음 10년 동안에는 그런 생각과 신념의 변화가 응집되면서 세계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예상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경제주체들이 공감하지만 개별 국가의 내부에서, 그리고 세계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국가들 사이에도 의견의 불일치나 이해관계의 중대한 충돌로 인한 불협화음과 마찰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다가올 10년 동안 개인과 기업 등 핵심 경제주체들이 주목해야 할 세계경제의 패러다임 변화 문제를 크게 21세기 글로벌 경제의 세력중심 이동, 국가와 시장의 새로운 관계 설정, 글로벌화의 진화 방향 등의 관점에서 조망해 본다.
2. 세계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전세계 많은 개인과 가계, 그리고 기업과 국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90년대 초반 구소연방 붕괴 이후 근 20년 가까이 고성장을 지속해 온 세계경제가 일부 지역이나 국가 차원이 아닌, 전지구적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스템 붕괴 위기에 봉착하는 대공황 이후 초유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선진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많은 개인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가계가 보유하고 있던 천문학적인 금융 및 실물 자산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위기로 인한 미국 가계의 순자산 손실은 2008년 한 해 동안에만 총 11조 달러(FRB 추산)에 달했으며, 미국과 EU의 실업률이 전후 최고수준인 10% 안팎으로 치솟았다. 여기에다 수많은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문을 닫았거나 인수합병되는 운명에 처했다. 국가 차원에서도 혁신적인 성장모델로 칭송되던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두바이 등 일부 국가들이 하루아침에 국가부도의 위기에 몰리는 극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위기의 파고에서 살아남은 국가나 기업 등 경제주체들 역시 이번 위기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한 처방을 찾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지난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장기 고성장 국면을 지탱해 왔던 세계경제의 기본 패러다임에 무슨 결함이 있었는지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새로운 미래를 위한 대안 모색이 불가피한 시점에 이른 것이다.
사실 2008년의 금융위기가 아니더라도 세계경제의 과거 패러다임은 이미 여러 방향에서 중대 도전을 맞고 있던 상황이었다. 중국, 인도 등 신흥경제권의 빠른 성장과 비중 확대, 미국의 대규모 재정, 무역 적자와 달러화에 대한 신뢰 저하, 여기에다 세계경제가 장기간 고성장을 지속해 온 데 따른 여러 부작용, 그 중에서도 특히 양극화 문제와 지구환경 파괴, 그리고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에너지자원 고갈과 글로벌 온실가스 규제 확산 등과 같은 21세기적 현안들이 지난 10년동안 동시다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과 서방국가’ 중심의 기존 세계경제 질서, 그리고 이들이 확산시켜 온 ‘글로벌 스탠더드’에 기초한 ‘경제 자유화’ 및 ‘글로벌화’ 드라이브 등을 골자로 하는 기존의 세계경제 패러다임으로 제대로 담아내거나 해결의 방안을 제시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지난 20세기적인 생각이나 신념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이 누적되면서, 21세기적 상황에 맞는 세계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필요성이 위기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세계경제가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대한 변화의 모멘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기를 계기로 미국, 경제 자유화, 글로벌화 등 지금까지 세계경제를 떠받쳐 오던 몇 개의 큰 기둥들이 일부는 허물어지고, 또 일부는 큰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리먼쇼크 후부터 최근까지 1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계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힘의 중심이 미국과 서방국가들에서 중국, 인도 등 신흥경제권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징후가 더욱 분명해졌고, 자국의 경제 및 금융 시스템 안정과 지속가능성을 책임지는 세계 각국 정책당국자들의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국가와 시장, 정부와 민간의 역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변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 특히 자신의 일자리와 소득, 보유자산 가치, 연금 등과 같은 구체적인 경제 문제, 특히 먹고사는 문제를 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신념이 금번 위기를 거치면서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다.
3. 미국과 중국 사이의 힘의 이동
먼저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중국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다음 10년은 미국과 중국 사이의 힘의 교체가 본격화되는 시기가 될 것이며, 그 이후, 즉 2020년대에는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마침내 세계 최대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경제예측기관 글로벌 인사이트(Global Insight)의 최근 전망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1/3 수준을 기록한 중국의 GDP(경상기준)는 2023년 미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서고, 2030년에는 중국의 GDP가 미국의 1.5배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개혁개방 초기인 지난 1990년 당시 중국의 GDP가 미국의 6%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다 중국, 인도, 브라질 등을 포함한 신흥시장경제(Emerging markets)와 선진경제권(Advanced economies) 사이의 격차도 다음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2030년 이전에 전자의 GDP 합이 후자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다음 10년은 중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으로 대표되는 신흥시장경제와 미국이 중심이 된 선진경제권 사이의 힘겨루기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10년이 될 것이다. 기존의 경제 파워를 유지하려는 미국 등 선진국들의 마지막 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신흥경제권이 지난 18세기 말 산업혁명 이후 수 세기만에 처음으로 세계경제의 주도권에 바짝 다가서는 세기사적 장면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세계경제의 무대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신흥경제권의 발언권은 지난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등 서방선진국들의 영향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경제규모(GDP)로 대표되는 현실적인 힘의 저울은 중국과 신흥경제권 쪽으로 점차 기울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 글로벌 통상, 금융, 자원, 환경, 노동, 기술표준 등 21세기 미래의 세계경제 질서를 자신에게 보다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한 미국과 중국, 서방선진국과 신흥경제권 사이의 갈등과 마찰, 그리고 서로의 이익을 위한 타협과 봉합의 노력도 다각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질서의 재편 과정이 얼마나 순조로울지는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다음 10년 동안 미국과 중국, 그 어느 쪽도 세계경제의 질서 재편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기 어려운 힘의 진공 상태가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 가장 큰 리스크 요인이다.
세계경제 전반에 무질서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매 사안 마다 적나라한 힘의 논리가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런 불안정한 상태가 자칫 2008년 위기에 버금가는 또 다른 중대파국을 불러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G20 등을 통한 글로벌 수준의 공조 및 협의체가 제대로 기능을 수행할 경우, 특히 미국과 중국이 전략적인 대화를 통해 상호이익과 공존을 심도 있게 모색해 나갈 경우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세계경제 주도권의 재편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중국이 많은 개도국들에게 한 나라의 경제성장과 국가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롤 모델(Role model)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미 2008년의 위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국가주도 경제성장(State capitalism) 모델에 대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후발개도국들의 관심이 점차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 성장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조급증과 더불어 국가차원의 시스템 위기 방어에 많은 관심을 가진 개도국의 정책담당자들이 정치적 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국가가 성장계획을 주도하고 자원배분을 관리 및 통제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이 성장 효율 측면에서나 위기 방어 측면에서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예상대로 향후 10년 동안 중국의 실질적인 경제력이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상황으로 전개되어 갈 경우, 지난 1990년대 세계은행과 IMF 등 미국의 워싱턴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국제금융기구들이 경제개혁 및 성장 처방으로 개도국들에게 권고했던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의 영향력이 상당 부분 퇴색하고 이를 대체하는 일종의 대안으로 중국식 국가주도 성장모델, 혹은 ‘베이징 컨센서스(Beijing Consensus)’가 많은 후발개도국들 사이에 상대적으로 더 조명 받을 것으로 보인다(앞페이지 <박스> 참조). 경제성장의 방식을 둘러싼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민간부문의 자율과 창의를 꾸준히 확장시켜 왔던 지금까지의 세계경제 발전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일정 부분 퇴행적인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옳고 그르냐의 여부와 무관하게, 후발개도국들 사이에서는 다음 10년 동안 세계경제의 실질적인 힘의 이동을 반영하는 주목할 만한 흐름이 될 것으로 보인다.
4. 국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생각
경제 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 확대 및 강화 흐름은 비단 후발개도국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서방선진국에서도 이미 가시화되었다. 투자은행 등 부실화된 금융기관과 개별 산업 및 기업에 대한 정부의 직접지원이 많은 나라에서 위기극복 방안의 일환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민간소비 위축을 대신하는 정부소비의 증가로 정부재정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 1~2년 사이 급등하는 양상을 보였고, 녹색산업, IT, 교육 등 미래 전략부문에 대한 정부 지원도 크게 늘어났다. 공적자금을 투입한 은행 등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의 경영 감독 및 금융시스템 규제 강화도 글로벌한 현상이다.
눈앞에 닥친 경제 및 금융 시스템 붕괴 조짐을 막고 잠복해 있는 추가적 리스크를 제거해 경제 전체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한편, 국민 다수의 일자리와 소득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면 국가가 시장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규율을 강화하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 용인되고 있다. 그러나 향후 시간이 흐르면서 위기의 여진이 사라지고 성장과 소득, 일자리가 과거의 정상적인 국면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서는 시점이 오면, 국가와 시장, 정부와 민간의 관계는 원상회복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소위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통해 정부 재정수지는 대규모 적자에서 다시 균형을 향해 움직여 나갈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위기 직후 높아진 각종 세율이 다시 하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이 들어간 개별 금융기관이나 기업의 경영이 정상화될 경우 이들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나 감독도 과거의 통상적인 수준으로 복귀하게 될 것이다. 과도한 리스크 감수 행동(Risk-taking)을 막기 위해 금융기관 임직원의 보수를 일정수준으로 제한하는 일도 상황에 따라 유야무야될 수 있다. 무엇보다 ‘큰 정부’의 비효율 문제가 부상하면서 경제성장의 걸림돌로 지목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국가와 시장, 정부와 민간의 관계는 다시 위기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위기의 발단과 진행 및 극복과정에서 남겨진 교훈은 제어되지 않은 과도한 시장 자율과 정부의 규제감독 기능의 지나친 약화가 국가 경제시스템 전체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중대 리스크 요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감독은 개별 국가차원에서, 그리고 글로벌 공조 차원에서 크게 강화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실물 부문에 투영된 금융의 의미와 성장에 대한 기여도는 위기 이전에 비해 상당히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단 한번 커진 정부의 기능과 역할은 그 관성 상 다시 줄어들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최근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미래 전략산업 지원책이나 글로벌 차원의 온실가스 규제 대응 등과 같은 부문에서 정부의 역할은 향후에도 계속 확장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자국 산업의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될 전략산업에 대해서는 R&D 지원, 정부 구매, 외국기업에 대한 진입 제한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한 과감하고 공세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위기 이후 크게 증가한 실업자 및 빈곤층에 대한 정부의 교육훈련, 의료혜택, 주거복지, 실업급여 지원 등 사회안전망 강화 노력은 정부의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의 생각을 위기 이전과는 크게 다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생각해 볼 문제다. 위기 국면 동안 취약 계층의 일자리와 소득 등에 가해진 충격은 향후 경기가 다시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장기 구조적인 문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시장이 풀지 못하는 문제는 결국 정부가 개입해서 풀수 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시대의 큰 흐름과 더불어 큰 정부와 작은 정부 사이를 오가는 패러다임의 추는 2008년 위기를 맞아 작은 정부에서 큰 정부 쪽으로 급속히 옮아갔지만, 다시 작은 정부로 복귀하는 속도는 예상외로 크게 더딜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나라마다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고 개별 국가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과 상황에 따른 별도의 타협과 모색이 이루어질 것이나, 전세계적으로 다음 10년 동안은 큰 정부 쪽에 무게중심이 좀 더 기울어진 모습이 될 것이다.
5. 난기류에 휩싸인 글로벌화
글로벌화(Globalization) 흐름은 작은 정부(혹은 경제 자유화) 추세와 더불어 위기 이전 세계경제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국경을 초월한 상품과 서비스, 노동력,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현실화되면서 전세계 많은 저개발국의 절대빈곤 해소와 선후진 각국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 기업의 시장 확대와 비즈니스 혁신, 그리고 소비자 후생의 획기적인 증가 등이 가능해졌다. 특히 지난 1995년 국제무역기구(WTO) 창설 이후 글로벌화 흐름에 본격적으로 동참한 중국과 인도 등은 글로벌화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러나 지난 20여년 동안 세계경제의 성장에 크게 기여해 온 글로벌화의 흐름에도 위기 이후 일정한 이상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각국 외교통상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차지했던 FTA 체결 움직임도 일단 제동이 걸린 상태이다. 한미 FTA가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아직은 어떤 나라도 보호무역으로의 회귀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자국의 산업보호, 근로자의 일자리와 소득 유지를 위해서라면 상품, 자본, 노동의 국제간 흐름에 과거와는 다른 접근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점점 늘고 있다. 먼저 무역 관련 사안으로는 주요 공산품에 대한 보복관세 부과 등 통상마찰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위기 이후 주목받고 있는 미국의 Buy American과 중국의 자국산 하이테크 제품 우선 구매 조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9년 2월 경기부양 법안에서 철강제품 등에 대한 Buy American 조항 도입을 시도했던 미국의 경우 최근 의회의 2,000억달러 규모의 일자리 창출 법안에서 다시 이 조항을 강화, 신설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한 중국 정부는 2009년 10월 정부 기관이 하이테크 제품을 구매할 경우 자국내 지적재산권을 보유한 제품에 대해 우선권을 부여하도록 했다. 미국과 중국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지만 글로벌 무역의 양대 축을 맡고 있는 이 두 나라가 특정 상품군에 대해 외국기업을 사실상 차별대우하려는 의도를 실제 갖고 있거나, 향후 구체화시켜 나갈 경우 글로벌 무역 전반에 예측불허의 파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외에도 최근 미국과 EU에 이어 중국이 각각 반독점법의 역외 적용을 명시하면서 선진국과 개도국을 가리지 않고 외국기업의 자국 또는 역내 활동에 대한 장벽을 높여 나가는 추세다. 2009년 5월 EU가 미국의 인텔에 대해 불공정 거래를 이유로 거액의 과징금(10억 6천만 유로)을 부과했고, 중국 정부는 지난해 3월 반독점을 이유로 코카콜라의 중국 음료업체 후이위엔(Huiyuan) 인수를 무산시킨 바 있다. 특허나 기술 관련 장벽도 높아지고 있다. WTO가 집계한 무역기술장벽(Technical Barriers to Trade agreement) 건수는 2005년 771건에서 2008년 1,251건, 그리고 2009년 3분기 현재 1,500건으로 늘어났다.
물론 공정거래 이슈나 특허 장벽과 관련한 이런 최근의 흐름이 반드시 반글로벌화 흐름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가까운 장래에 자국의 정치사회적 요구를 만족시킬 만한 일자리, 소득 등의 가시적인 개선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많은 나라의 정부들이 보호주의에 경도되는 양상을 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경제적 합리성의 문제와는 별개로 자국의 일자리와 소득 창출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외국기업의 국내 활동, 그리고 국내의 일자리와 소득을 해외로 이전시키는 자국기업의 해외투자를 바라보는 정부와 국민의 눈길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3월 프랑스 정부는 르노자동차에 대해 특정 모델의 해외(슬로베니아) 생산을 동결하고 대신 국내생산을 확대하라고 권고했다가 EU 반독점 당국의 강력한 경고를 받고 철회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금융의 글로벌화 문제도 짚어보아야 할 부분이다. 2008년 위기 이후 글로벌 유동성이 급격히 줄어든 데다 실물경기의 전반적인 부진 지속, 금융부문에 대한 글로벌 차원의 규제와 감독 강화 등으로 향후 상당기간 글로벌 자본이동, 특히 해외직접투자(FDI)는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 20여 년간 개도국의 고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해 온 선진국의 투자자금이 위기 이후 자국회귀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LGBI> 2009년 8월 5일자,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을 헤쳐나가려면‘ 제하의 글을 참조), 개도국들에 대한 투자도 베트남, 브라질 등 소수 유망국가나 유망산업을 중심으로 한 선택과 집중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추세가 앞으로 얼마동안 지속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글로벌 유동성의 흐름과 해외직접투자의 위축을 유발한 요인들은 단시간 내 원상회복되기 어려운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풍부하고 값싼 유동성, 국제간 대규모 M&A 거래, 각종 자산시장의 급성장 등과 같은 위기 이전의 금융 글로벌화 흐름은 당분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6. 패러다임 변화와 기업 비즈니스
다가올 10년 동안 세계경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 움직여 나갈 것이다. 다양한 모색과 시도를 통한 순조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질수도 있지만, 지금 예측하기 어려운 충격과 혼란이 발생하면서 세계경제를 혼돈 속으로 몰아갈 가능성도 있다. 특히 중국과 미국 사이의 힘의 이동, 정부의 역할 확대, 글로벌화의 불투명한 전도 등은 글로벌 기업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기존의 사업환경과 비즈니스 전략에 중대 교란 또는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다.
기업들은 먼저 글로벌 시장의 중심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그 추세와 방향을 예의주시하고 적기 대응할 필요가 있다. 패러다임 전환의 대격변 시기가 될 다음 10년 동안에는 글로벌 시장의 비즈니스 환경변화를 조기에 정확하게 포착하는 감수성이 비즈니스 성공여부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경제상황이 어려울수록 현지 정부와 소비자, 그리고 로컬 기업들의 글로벌 기업에 대한 정서(sentiment)는 비우호적이고 공격적인 양상을 띨 것이다. 그만큼 글로벌 비즈니스에 수반되는 제반 리스크와 관련 비용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고객의 기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지닌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물론, 일자리와 소득을 중시하는 현지 정부와 국민들의 니즈, 그리고 지역사회의 성장과 발전 기대에 장기적으로 부응하는 글로벌 기업만이 다음 10년의 대격변기 동안에도 지속적인 성장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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