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신흥국의 ‘신흥’ 시대 끝났다'
지난 수 년간 신흥국에 대한 눈높이가 낮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경제를 이끌기는커녕 70~80년대처럼 구조적 저성장의 늪에 빠질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4~5%포인트이던 선진국과 신흥국의 성장률 격차는 지난해 2%포인트로 크게 줄어들었으며, 신흥국의 노동가능인구 증가를 고려하면 이 수치는 더욱 줄어든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상황이 당분간 나아지기 어렵다는데 있다.
신흥국 저성장의 배경에는 우선 수요측면에서 세계경제의 양대 축이던 선진국과 중국의 수요부진이 있다. 선진국 소비수요를 떠받쳤던 부채 증가 속도가 2008년 금융위기 이전에 비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구조적으로도 선진국은 인구고령화와 노동생산성 하락이 이어지면서 성장률이 크게 높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서비스 소비 비중이 늘어나면서 선진국의 성장이 신흥국의 수출증가로 이어지는 고리도 약화되고 있다. 세계경제의 성장을 이끌던 중국은 7% 성장도 버거운 상황이고, 중국당국이 추진하고 있는 소비중심 성장으로의 구조변화는 신흥국의 수출에 부정적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투자증가율이 낮은 수준에 오랫동안 머무를 경우 신흥국이 입을 타격은 지금보다 클 것이다.
공급측면에서는 신흥국의 투자율을 높이는데 기여했던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의 확산이 주춤하고 있다. 전 세계 수출 중에서 부분품의 비중이 줄어들고, 對신흥국 직접투자 증가율도 한 자릿수에 그치고 있다. 신흥국 자체의 투자율도 2011년 이후 크게 떨어진 것은 물론이다. 중간재 수입으로 신흥국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던 중국에서 부분품의 자급률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글로벌 생산 유발 효과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중국의 투자둔화와 전세계적인 자원절약형 성장패턴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자원수출 신흥국에는 부담이다.
이러한 변화는 신흥국에게는 크나큰 도전이 될 것이다. 상당수의 국가는 저성장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인적 자본과 제도적 수준이 우수하고 제조업 비중이 높은 국가들은 외부적인 요인이 불리하더라도 자체적인 성장동력을 찾아내면서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다.
신흥국 경제의 구조적 부진이 이어진다면 우리경제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신흥국에 대한 수출로 우리경제가 얻는 부가가치는 GDP의 23%에 이르는데다, 미래불안과 가계부채부담 등으로 내수기반 성장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회안전망 확충과 동시에 규제완화를 통해 서비스부문의 성장을 도모하는 한편, 기업 수준에는 신흥국 성장의 차별화를 고려한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 목 차 >
1. 신흥국 부진의 원인
2. 차별화의 길 걷는 신흥국
3. 맺음말
잔치는 끝났나? 신흥국 경제 전반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향후 세계경제의 성장을 이끌어나갈 기대주에서 골칫덩어리로 전락할 가능성마저 엿보이고 있다. 단기적인 경기둔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측면에서의 굵직한 성장부진 요인이 겹쳐서 나타나고 있다. 리먼사태로 대표되는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와 뒤이은 유럽의 재정위기 등으로 선진국 경제가 휘청거린 기간(2008~2012)에도 연평균 5.6%의 성장률을 나타내면서, 세계경제를 지켜 온(기여율 78.6%) 신흥국 경제의 성장세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국가별로 봐도 2013년까지 중국이 세계경제를 이끌었다면 2014년부터는 미국이 세계경제를 선도하는 모습이다.
사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선진국과 신흥국의 성장세 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그림 1> 참조). 1980년대 선진국에 비해 0.3%포인트 높던 신흥국 성장률이 1990년대에도 1.0%포인트 높은 데 그쳤다. 그러더니 2000년대(2000~2009) 들어 양측 간의 성장세 격차는 4.3%포인트까지 벌어졌다. 개혁개방과 선진국 기업들의 글로벌화 등에 힘입어 중국경제의 고속성장이 이어지고 원자재가격이 대폭 오르면서 브라질과 같은 자원수출국 경기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인 2010년대 들어 성장률 격차는 3.9%포인트로 다소 낮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최근 3년간만 보면 2012년 4%포인트 수준에서, 2013년 3%포인트 대, 지난해에는 2%포인트 대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신흥국(emerging economies)이라는 용어는 1980년대 초반 세계은행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빠르게 확산됐다. 현재 IMF는 선진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을 폭넓게 신흥국(emerging and developing economies)으로 분류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선진국이 아닌 나라에 대해서는 저개발국(less developed economies; LDC)이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한국과 같은 일부 고성장국이 신흥공업국(newly industrialized economies; NIEs)으로 불렸을 뿐이었다. 저개발국이라는 명칭이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주는 이름이 필요했다. 신흥국이라는 용어에는 빠르게 성장을 이어나가 선진국과의 차이가 줄어들 것이라는 믿음이 배어있었으며 실제로 그러한 기대가 예상보다 빠르게 현실화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중국경제의 성장둔화와 지난해 이후 러시아와 브라질 등의 경기후퇴로 신흥국 경제 전반에 드리워진 먹구름은 더이상 신흥국 경제의 고성장세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신흥국의 범주 안에 오히려 퇴행하는 나라들도 여럿 있고 나머지 나라들도 동질적으로 분류되기 어렵기 때문에 신흥국을 재정의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신흥국의 고성장세는 2000년대만의 독특한 현상인가? 아니면 신흥국은 상대적으로 저소득국가이므로 현재의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면 다시 빠른 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신흥국은 어떤 경로를 걷게 되는 것인가? 이하에서는 최근 나타나고 있는 신흥국 성장 둔화의 배경과 향후 성장세에 대한 함의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아울러 여러 신흥국이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신흥국 부진의 원인
① 선진국 경기 파급력 약화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 경기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면서 신흥국 역시 활력이 저하되었다. 선진국 경제는 금융위기 직전 3% 성장률을 기록했으나 위기 이후 1% 대에 그치고 있다. 선진국 경기 부진의 일차적인 원인은 2000년대 중반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부채 확대가 더 이상 용이하지 않다는데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선진국들은 부채확대를 통해 소비를 늘리면서 성장했으나 금융위기 이후 민간 부채 증가율이 급격히 하락했다(<그림 2> 참조). 이후 경기 급락을 막기 위해 정부 부채가 확대되면서 정부부채와 민간부채를 합산한 총부채는 증가추세가 유지되고 있으나 증가율은 금융위기 직전 연평균 8% 이상에서 최근 3% 수준으로 둔화되었다.
더욱이 고령화와 노동생산성 부진으로 향후 선진국의 경기 회복속도는 더딜 것으로 보인다. OECD 회원국 기준으로 전체인구에서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대 초반 13% 수준이었으나 최근 16%까지 상승했다. 선진국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둔화되는 현상 역시 경기 회복을 지연시키고 있다. 선진국 노동생산성 증가 속도는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과거 경기회복기에 비해서도 회복 속도가 더디다. 경기불확실성이 지속되면서 자본축적 부진, 기술혁신 약화, 노동시장의 효율성 저하 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선진국의 신흥국으로의 경기 파급력도 약화되었다. 경기확장기에 선진국은 신흥국으로부터 수입을 늘여 신흥국 경제 성장을 이끌었으나 최근에는 그 연결고리가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그림 3> 참조). 이는 선진국의 고령화와 서비스 산업 확대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기대수명이 연장되면서 선진국 소비자들이 병원 등 헬스케어 서비스에 지출하는 금액은 꾸준히 늘고 있다. 미국 GDP에서 헬스케어에 지출하는 금액의 비중은 2000년대 초반 12.6% 에서 최근 16.4%까지 확대되었으며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중인 일본도 7%에서 10%로 확대되었다. 반면 신흥국으로부터 수입유발 효과가 큰 가전, 스마트폰, 자동차 등 내구재 소비 비중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실제로 선진국 경제성장률과 신흥국의 對선진국 수출 사이 상관계수는 2006년~2010년 사이 0.68이었으나 2011년~2015년 1분기에는 0.26으로 감소한 바 있다.
올해 미국을 중심으로 선진국 경기가 회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의 경기 파급력이 약해짐에 따라 신흥국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선진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에서 기인한 만큼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② 중국의 투자율 하락
중국의 성장세 둔화
수요측면에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떠오른 중국경제의 구조변화도 신흥국 부진의 주된 요인이다. 중국의 급격한 성장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공급자로서의 역할도 컸지만 중국 자체의 투자와 소비가 확대된 덕분이기도 하다. 다른 신흥국들은 중국에 원자재와 중간재 등을 수출함으로써 성장의 과실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2011년 이후 이러한 구조가 서서히 약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성장률이 점차 하락하면서 신흥국 수출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가격도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4>는 세계경제 성장에서 각국이 기여하는 수준을 나타낸다. 이에 따르면 중국의 성장률이 하락하면서 신흥국 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의 성장률이 향후 수 년간 추세적으로 하락할 수 있다는 점은 신흥국 경제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주요 국제기구와 투자은행의 장기 중국성장률 전망은 수 년 전에 비해 최소 2%p 이상 하락하였다. 심지어 미국의 서머스(Lawrence Summers) 교수 등은 지난해 발표한 논문에서 중국의 성장률이 앞으로 수 년 후 2~4%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중국의 투자율 하락과 성장방식의 변화가 신흥국에 더 큰 영향
중국의 성장률보다 신흥국 성장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바로 중국의 투자율 하락과 소비중심 성장이다. OECD의 세계투입산출표(World Input-Output Table) 분석에 따르면 중국의 고정자산투자가 교역상대국의 부가가치(GDP)를 늘리는 효과는 소비의 평균 2.1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중국의 성장동력 변화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국가는 대만, 한국, 사우디 아라비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크거나 원자재를 수출하는 국가들이다(<그림 5> 참조).
위 분석의 함의는 성장률 수치가 같더라도 중국의 성장에서 투자와 소비의 비중이 변하는 것만으로도 신흥국의 성장에는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더해 고정자산 투자에 투입되는 원자재의 수요감소가 가격하락으로도 이어지게 되므로 신흥국은 이중으로 타격을 입게 된다.
투자율 하락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
최악의 경우 중국의 투자율이 급락한 후 낮은 수준에 머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990년대 초반 버블붕괴 이후 일본은 GDP의 30%에 달하던 투자율이 급락한 후 현재까지도 낮은 수준에 그치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에도 30% 후반에 달하던 투자율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0%포인트 이상 하락한 후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아직까지 GDP 대비 투자율은 크게 낮아지지 않고 있으나 투자증가율은 이전 시기의 절반 수준인 10% 초반에 그치고 있다. 또한 투자의 상당부분을 중앙정부의 인프라투자가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속가능성도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에 더해 최근 불거지고 있는 중국국유기업의 이익하락과 파산가능성이 자칫 은행부문의 자산건전성 훼손으로 이어질 경우 중국의 투자율은 과거에 비해 크게 낮아진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도 있다.
2008년 이후 세계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온 중국경제의 부진과 구조변화는 신흥국들에게 주요 수출품목의 수요부진과 그에 따른 가격하락이라는 이중고가 되고 있다. 더욱 경계할 점은 이러한 추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앞서 서술한 선진국의 부채축소와 중국경제의 변화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경우 대외수요 확대로 성장을 이어온 신흥국의 부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③ 글로벌 분업구조 성숙화
90년대 이후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분업구조가 확대되면서 세계교역이 빠르게 증가해왔다. 중국은 고부가가치 부품·소재를 우리나라나 일본 등 주변 선진국에서 조달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해 이를 조립 가공한 뒤 선진국 시장에 판매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뿐만 아니라 여타 신흥국으로도 분업 구조가 확대되었다. 중국 업체들이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더욱 낮은 가격에 중간재를 조달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아세안 국가들의 대중수출은 70%가 중간부품이다. 원자재 수요가 폭증하면서 브라질, 러시아 등 자원생산국 수출도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이처럼 글로벌 생산네트워크가 확대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소비나 투자 가운데 수입재 비중은 꾸준히 상승해왔다. 최종제품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다양한 국가로부터 중간재를 모아서 최종제품을 생산하는 경우도 크게 늘었다. 신흥국들은 이러한 분업구조에서 중간재를 공급하거나 최종재를 조립하여 수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에 따라 전체 교역 중에서 중간재 비중은 1990년 이후 2008년까지 꾸준히 증가하여 60%까지 확대되었다.
글로벌 생산네트워크 확산 속도 둔화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생산네트워크 확산 속도가 더뎌졌다. 글로벌 생산네트워크 확산 속도가 둔화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신흥국으로 향하는 외국인 직접투자 증가율이 하락하고 있다. 90년대 40%를 넘어섰던 외국인 직접투자 증가율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급락한 후 최근에는 한자릿수에 그치고 있다(<그림 6> 참조). 선진국 기업들이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신흥국으로 생산지를 확대하는 추세가 주춤해 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세계 교역에서 중간재 비중이 줄어들었다는 사실로도 글로벌 생산네트워크 확산 속도가 더뎌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61%까지 높아진 중간재 비중은 지난해 58%로 낮아졌으며 금액 기준으로는 오히려 감소하기도 했다(<그림 7> 참조).
이러한 현상은 전세계 교역에서 해외부문 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국가가 재화를 수출할 때 해외에서 생산된 부분과 자국에서 생산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스마트폰을 세계시장에 수출할 때, 일정 부품은 한국에서 생산하고 나머지는 베트남 공장에서 조립, 가공한다. 전체 부가가치에서 베트남 부분품을 해외 생산 비중이라 할 때, IMF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이 비중이 2008년 47%에서 2012년 45% 정도로 감소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글로벌 생산네트워크 확산이 둔화되면서 교역이 신흥국 경기를 이끌어 가는 힘은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011년 이후 세계 경제 성장률에 대한 무역 탄성치가 크게 하락했다(<그림 8> 참조). GDP가 성장한다고 해도 교역은 늘지 않아 신흥국이 수출을 통해 성장할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성장률에 비해 저조한 무역증가율이 장기간 진행되는 경우 외국인 직접투자나 설비투자가 줄어들어 신흥국에는 상당한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간재를 외부에서 공급받던 중국경제가 자급화를 늘려가고 있는 점도 신흥국에는 불리한 요인이다. 태국이나 말레이시아처럼 일본 등 외자기업을 중심으로 중국에 중간재를 공급하던 국가들은 중국의 중간재 자급화 확대가 위협이 될 수 밖에 없다. 중국기업들의 기술력이나 경쟁력이 상승하면서 중국시장에서 입지가 약화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신흥국들은 글로벌 생산구조에 참가하면서 성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독자적인 성장전략을 추진하는데 그만큼 제약이 가해진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다자간 무역협정 등으로 자국기업에 대한 우대조치를 취하거나 수입대체 산업을 육성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신흥국의 조기탈공업화 조짐
하버드대학의 대니 로드릭교수는 앞서 설명한 요인 때문에 후발 신흥국들의 조기탈공업화(premature deindustrialization), 즉 신흥국 경제에서 제조업 비중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현상을 경고하기도 한다. 제조업은 상대적으로 생산성 향상이 빠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이 제조업을 육성함으로써 경제성장을 가속화하는 패턴을 보였으나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분업구조가 약화되면서 후발 신흥국들이 제조업을 통해서 성장을 도모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으며 신흥국에서 저성장이 고착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드릭 교수의 경고는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최근 들어서 선진국과 신흥국의 성장률 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일부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최근 들어서는 중국의 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저임노동이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으로 이전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조립가공업의 탈중국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이 반드시 후발 신흥국에 이롭지는 않다. 인구규모가 중국에 비해 작아 임금상승이 빠르기 마련이어서 투자자들은 다시 임금이 낮은 국가로 이전할 가능성도 있다(<그림 9> 참조). 정보기술의 발달과 정보비용이 점차 감소하면서 글로벌 생산지간 대체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임금이 올라간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후발 신흥국으로 산업이 옮겨갈 가능성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임금 상승으로 인해 노동절약적 혁신이나 투자가 확대되어 총생산비용 상승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중국기업의 로봇 도입이 증가하면서 저임금 부문에서도 후발 신흥국이 우위를 점할 수 없을 수 있다는 비관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실제로 중국의 근로자 10,000명당 로봇대수는 21대로 세계 평균(53대) 보다는 적지만 2008~2014년 연평균 36%씩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④ 원자재 가격 하락
2000년대 중반 신흥국 성장을 이끌어 온 두 축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 국가와 이들 지역에 자원을 공급하는 신흥국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을 비롯해 금속, 식료품 등 원자재를 공급해온 남미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2000년대 중반 급격한 성장을 경험했다. 배럴당 20~30 달러 수준이었던 국제유가가 100 달러를 넘으면서 원자재 수출국의 경제규모는 지난 10년 간 평균 두 배 이상 확대되었다. 재정수입의 상당부분을 원자재가 차지하고 있어 재정 지출을 통한 소비 확대로 생활 수준 역시 높아졌다. 그러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국제유가가 배럴당 50 달러 이하로 급락하면서 자원 수출국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원유뿐만 아니라 곡물, 금속 등 여타 원자재 가격도 2008년에 비해 30% 가량 하락하였다. 중국 경기 둔화로 원자재 수요가 부진한 가운데 생산량은 꾸준히 확대되면서 국제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이에 따라 원자재 비중이 높은 국가일수록 성장률이 큰 폭으로 하락하였다(<그림 10> 참조). 심지어 위기 가능성이 제기되는 지역도 있다. 재정과 경상수지 적자가 심화되고 통화 약세로 인플레이션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브라질, 러시아 등 국가에서 금융 불안이 지속되는 상황이다. 지난 9월 S&P는 브라질 신용등급을 투기등급으로 하향 조정하였으며 러시아도 이미 두 개의 신용평가 기관에서 투기등급을 받았다.
일부 국가는 ‘네덜란드 병’에 걸린 것으로 우려된다. 네덜란드 병이란 자원수출로 일시적인 경제 호황을 누렸던 국가에서 물가와 통화가치 상승으로 제조업이 쇠퇴해 경기침체를 겪게 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원자재 수출국이 호황을 누리자 선진국 자본이 몰려들면서 신흥국 통화는 2000년대 중반 강세를 보였으나 이러한 통화가치 상승이 오히려 제조업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그림 11> 참조). 한때 러시아는 제지와 기계 부문에서, 브라질은 항공 부문에서 제조업 발전의 싹이 보이기도 했으나 이제는 성장 기회를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저유가가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자원 수출국의 어려움은 가중될 전망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에너지 수요가 둔화되는 가운데 타이트오일의 견조한 생산과 OPEC의 증산이 이어지면서 석유 공급과잉국면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로 전세계적인 탈석유 정책이 강화되고 그린이노베이션이 가속화 되는 현상 역시 원자재 가격 상승을 억제할 것으로 예상된다.
2. 차별화의 길 걷는 신흥국
신흥국 경제를 둘러싼 환경이 180도 달라졌다. 세계경제는 가까스로 3% 선을 줄타기하고 있고 중국경제를 보는 국제사회의 시각도 경이로움에서 엄청난 잠재적 리스크에 대한 우려로 바뀌었다. 글로벌 생산네트워크 확장세는 둔화돼 가고 원자재가격은 폭락 후 바닥을 기고 있다.
달리 말하면, 신흥국 경제의 고성장은 외부환경이 개선된 데 힘입은 바 컸던 것으로 풀이된다. 신흥국의 내부적인 문제는 세계경제 호황이나 중국의 고속성장과 같은 좋은 흐름에 묻혔던 것이다. 그에 따라 내부여건이 좋은 나라건 나쁜 나라건 커다란 차이 없이 고성장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신흥국을 둘러쌌던 우호적인 환경은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신흥 각국은 자국의 실력으로 어려운 여건을 극복해야 하는 도전과제 앞에 홀로 서 있는 셈이다.
앞서 성장을 일군 나라들의 경험을 보면 지속적인 성장의 가장 중요한 토대는 경제 내부의 제도적 수준이나 인적 자본과 같은 요소였다. 여기에 우호적인 외부여건은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 석유와 같은 원자재를 수출해 급속한 성장을 이룬 중동 국가를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원유 가격이 폭락하면 어김없이 경제가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원자재 수출국들은 인프라나 제조업 투자를 늘려 원자재 가격변동과 상관없는 지속성장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규모의 물적 투자가 이뤄진다 해도 이것이 장기적인 성장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적자본이나 제도적 기반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토대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생산성 향상이 빠른 제조업이 성장을 이끌어 갈 수 있는지 여부도 신흥국의 앞날을 가를 중요한 요인이다. 시장 규모도 신흥국의 성장 토대가 될 수 있다. 많은 경우 신흥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시장성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유망 신흥국이라 하면 발전가능성이 높고 시장규모가 큰 나라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주요 신흥국 15개국(<표 1> 참조)을 대상으로 ①인적자본 축적(Human Development Index), ②제도적 우수성(World Government Indicators), ③기업활동의 용이성(Doing Business Index), ④제조업 비중 등을 기준으로 장기적인 성장가능성을 평가하고 GDP를 시장규모의 지표로 살펴보았다(인적 자본과 제도수준이 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LG Business Insight 1370호, ‘제도개선 없이 장기지속 성장 어렵다’ 참조).
이들 지표들로 보면 말레이시아, 태국, 터키 등의 국가는 향후 성장 가능성이 있고 시장으로서의 매력도 역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란, 베네수엘라, 나이지리아 등의 국가는 어려움이 예상된다.
각국별 차별화 요인과 양상
개별국별로 보면 말레이시아는 신흥국 중 상대적으로 제조업 기술력이 높고 인건비는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저렴한 편으로서 반도체를 중심으로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세계교역이 10% 이상 감소하는 부진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올해 하반기 들어 수출과 산업생산지수가 증가세로 돌아섰다. 다만 정치불안과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인한 통화약세는 불안요인이다. 국영투자회사인 1MDB의 채무위기가 불거지고 1MDB에서 나집라작 총리에게 상당금액을 입금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총리 퇴진에 대한 촉구가 일고 있다.
터키는 거대인구, 빠른 제조업 성장, 지정학적인 위치가 강점이다. 다른 이슬람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의 영향력도 작은 편이다. 그렇지만 평균 교육연수가 길지 않고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과거에 비해 크게 낮아지는 등 인적자본의 축적이 더딘 점은 천연자원이 부족한 터키 경제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아울러 최근들어 정치적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은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모디정부의 개혁 정책 효과에 힘입어 인도는 제조업 발전이 지속될 전망이다. 모디정부는 ‘메이크 인 인디아’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인프라투자 확대와 외국인 투자 규제 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자동차는 자체 생산 브랜드가 있으며 인도에 생산기지를 세우고자 하는 외국 기업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그러나 인도가 중국과 같은 고성장을 보이며 세계경제성장을 이끌어 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평가된다. 모디노믹스 개혁의 핵심인 토지수용법, 노동법, 단일부가가치세 등 3대 경제 개혁 입법이 최근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으며 관료주의 폐해가 이어지면서 지난날 한국이나 최근 중국이 보여 온 역동성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지리적 근접성, 인구구조 등에 힘입어 최근 중국을 대체하는 생산지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외의 여러 전자기업들이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생산거점을 옮기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1980년대 후반 시작된 개혁개방 정책(도이모이)이 정치체제의 경직성으로 사실상 실패로 끝난 이후 체제 내에서 새로운 성장 돌파구가 나타나지 않고 있고 인적자본 수준이 높지 않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성장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이란은 최근 미국과의 핵협상 이후 국제사회로 복귀할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관심을 받고 있다. 이란은 석유나 식량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국토가 넓으며 인구도 8천만 명으로 많은 편에 속한다. 교육수준도 인근 지역에 비해 상당히 우수한 편으로 미국과의 핵협상이 타결된다면 10여년간의 침체를 딛고 성장을 재개할 가능성은 있다. 그렇지만 종교가 정치와 경제를 옥죄는 상황이고 기본적으로 자급자족형 경제를 지향하고 있어 핵협상 타결만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 러시아처럼 성장의 기회를 상실한 국가들도 있다. 브라질은 제조업 부문 비중이 17%에서 최근 11% 수준으로 하락했으며 원자재 가격마저 곤두박질 치면서 성장 동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더욱이 2000년대 중반 고성장시기에도 인프라와 제도 정비를 통한 근본적인 경제구조 개편이 이뤄지지 못하고 악재는 누적되었다. 최근에는 부진한 경제상황에 더해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정치불안까지 번지고 있다.
러시아 역시 원유를 대체할만한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최근 시리아 내전 참전으로 지정학적 위험마저 높아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제재로 수출 및 금융거래도 어려움에 처해 향후 수년간 침체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로스네프트 등 에너지 기업들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정부에 외환 지원 요청이 늘어날 경우 기업 부실로 인한 금융위기 가능성도 간과하기 어렵다.
3. 맺음말
신흥국의 고성장세 회복은 상당기간 기대하기 어려운 듯 하다. 오히려 전반적인 성장둔화가 불가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성장세의 추가적인 하락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글로벌 공급사슬의 확산 둔화나 자원가격 약세 등 고성장기 신흥국 경제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감안하면 향후 신흥국 경제는 각국의 구조적 특성에 따라 분화 과정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자원 의존도와 제조업 비중 및 인프라 정도, 제도나 인적 자본 정도 등이 주요 변수가 될 것이다.
신흥국 경제의 성장둔화는 인구 고령화 및 생산성 증가세 둔화로 성장애로를 겪고 있는 우리경제에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다. 미래불안과 가계부채부담 등으로 가뜩이나 내수기반 성장이 힘겨운 과제가 되고 있는 터에 대외수요 측면에서도 추가적인 난제가 나타남으로써 근본적인 구조변화 없이는 돌파구를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3%대 초반의 터널에 갇혀있는 세계경제 성장세가 신흥국의 향후 성과에 따라서는 2%대로 추가 하락할 수도 있는 형편이다. 특히 미국의 금리 인상이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 혹은 수준으로 전개될 경우 경상수지 등 대외안정성이 취약한 일부 신흥국이 금융위기를 겪으며 실물경제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신흥국의 성장정체가 특히 우리 경제에 부담이 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수출이 신흥국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과 관계 깊다. 우리나라의 신흥국에 대한 수출은 56% 수준으로 높은 편이다. 신흥국 경제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시장환율 기준 39.2%, 구매력 기준 57.1% 수준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높음을 알 수 있다. 부가가치 면에서도 신흥국에 대한 수출은 우리나라 GDP의 약 23%를 차지하고 있다. 경기요인에 더해 세계경제의 서비스화 진전과 같은 구조적 변화까지 겹치면서 수출부진이 우리 경제의 추가적인 성장세 하락의 원인이 되고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최근 그리고 향후 신흥국 경기부진의 한가운데에 중국경제의 둔화와 성장방식 변화가 자리잡고 있다. 각국의 성장잠재력과 제조업 환경, 글로벌공급사슬 변화 등을 감안할 때 중국과 같은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가 나타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제조업 생산의 독점을 통한 고도성장도 어려워 지고 있다. 중국은 과거 일본과 한국, 대만과 같이 범국가적으로 제조업에 집중하면서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교통 및 정보의 발달로 각 기업의 글로벌 공급사슬이 세분화되며 여러 지역으로 분산된데다 물류와 정보 발달로 생산지간 대체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한 국가의 글로벌 생산 면에서의 집중도가 낮아지고 있다.
신흥국의 경기부진은 두 가지 과제를 던져준다. 첫째는 우리 경제가 내수성장을 통해 수출주도 성장의 한계를 극복해나가야 할 불가피성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구조변화로 수출중심국보다 내수중심국의 성장세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수십 년 간 선전해 온 수출에 주력하면서도 연금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동시에 규제완화를 통해 잠재수요가 있는 서비스의 공급애로를 제거하는 등 내수성장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되고 있다. 둘째는 기업들의 대응방식 변화다. 신흥시장의 성장세가 전반적으로 둔화되는 흐름을 인정한다 해도 긍정적인 면은 있다. 중국 등 일부 거대국가들의 경우 도시화가 더욱 진전되고 핵심소비인구계층이 커지는데다 내수확대정책으로 소비시장 규모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신흥국의 차별화를 고려한 전략의 재검토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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