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의약품 유통 선진화를 위한 과제'
의약품은 다른 제품과는 달리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기 때문에 생산·유통·소비 등 전 단계가 법에 의해 엄격히 규제되고 있으며, 의사·약사 등 전문인에 의해 선택과 공급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영업이나 유통 등의 과정이 폐쇄적이고 투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불법 리베이트 등 불공정 거래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유통 과정에서의 구조적 문제점은 제약회사의 판촉 경쟁을 과열시키고, 제품력 향상보다는 영업 부문에의 지나친 집중을 불러일으켜 제약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와 관련 단체들은 공정경쟁규약의 마련, 의약품 유통정보센터의 설립 등을 통해 유통 거래의 투명성을 제고하고자 하는 방안을 시행하고 있으나, 아직 그 성과는 뚜렷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제약산업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보면, 제약회사와 도매업체가 의약품의 제조와 유통이라는 부문에서 서로의 역할을 잘 구분하고 있으며, 유통정보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어 투명하고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바탕이 되고 있다. 따라서 국내 의약품 유통이 선진화되기 위해서는, 도매의 대형화를 통해 유통 구조를 현대화시키고, 유통정보시스템과 강력한 공정거래 감시체제를 통해 투명한 거래 질서를 확립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의약품 유통 거래의 주체들이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합리적인 유통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데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 목차 >
Ⅰ. 논의의 배경
Ⅱ. 선진 시장의 의약품 유통 현황
Ⅲ. 국내 의약품 유통 산업의 과제
Ⅳ. 시사점
I. 논의의 배경
2007년 11월 공정거래위원회가 국내 주요 제약회사 10곳의 부당고객유인행위를 적발하고 해당 기업에 총 200여 억 원에 이르는 과징금을 부과하는 사건이 있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 발표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국내 제약업계에 만연해 온 뿌리깊은 리베이트 관행, 전근대적인 유통 거래, 취약한 연구개발 역량 등 구조적 문제점이 다시 한 번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제약회사들은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불법으로 지급해야만 했을까? 이하에서는 의약품 유통 산업의 관점에서 불공정 거래가 발생하는 원인과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국내 의약품 유통 산업의 문제점
제약회사의 과도한 판촉 경쟁
의약품은 다른 재화와는 달리 소비자의 생명과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생산·유통·소비 등 전 단계가 약사법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의약품 제조업자와 도매업자, 약국 또는 병·의원 종사자는 약사법 등 유통 질서 유지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준수할 의무가 있음). 이렇듯 제약산업은 엄격한 규제에 의해 움직이고 있어 의료 전문인이 아닌 일반인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크지 않다. 특히 전문의약품의 경우 최종 구매자인 소비자의 선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특수한 시장이다. 이와 같은 구조적 특성 때문에 제약회사들은 의약품의 선택권을 가진 의사나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집중하게 된다. 따라서 제약회사가 혁신적이고 우수한 효능을 지닌 의약품을 보유하고 있다면 영업이 수월해지며, 그렇지 못할 경우 제품 판매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따라서 제품 차별화가 어려운 기업들은 영업 부문에만 전력을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다국적 기업들에 비해 제품력이 취약한 국내 기업들의 경우 영업 조직을 중심으로 한 판촉에 치중하고 있으며, 그 결과 업체 간 경쟁이 과열되어 매출 원가의 20~25%에 이르는 금액을 리베이트 등에 지출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과당 경쟁으로 유발된 제약회사의 비용 부담은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 집중도를 떨어뜨려 제품 역량 강화에는 소홀하게 되는 악순환을 가져오고 있다. <그림 1>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미국이나 일본의 주요 제약 기업들의 매출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16~17%에 이르는 반면, 국내 제약 기업들의 연구개발 투자 비중은 평균적으로 7%대에 머물러 있어 생산하는 제품의 질적 차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차별화된 제품을 보유하지 못한 국내 기업들은 또다시 영업에만 기댈 수 밖에 없어 불법 리베이트 등 판촉비를 과도하게 지출하는 결과가 되풀이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제약 기업들 간 판매 경쟁이 최종 소비자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제공하지 못하며, 오히려 과도한 리베이트 제공 등으로 인해 의약품의 가격만 높아져 지출 부담만 늘어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비합리적인 유통 거래를 통해 발생하는 엄청난 비용을 국민들이 떠안게 되는 것이고, 대부분의 전문의약품이 보험 리스트에 등재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지급해야 하는 약제비(보험료) 또한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
복잡한 유통 구조
국내 의약품 시장에서의 공정하고 투명한 거래를 방해하는 또 다른 원인으로 복잡한 유통 구조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의약품 유통 구조는 생산-도매-소매로 이어지는 2차·3차의 다단계 도매 업체들이 존재하는 매우 복잡하고 다원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림 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제약회사에서 생산된 의약품은 직접 약국이나 병·의원으로 공급되거나(직거래) 도매상을 거쳐서 공급되게 된다(도매 거래). 2000년 의약분업 실시 이전에는 일반 병·의원에서 의약품을 직접 판매했으므로 직거래에 의존하는 비중이 약 75%로 매우 높았으나, 의약분업 실시 이후에는 약 52%로 감소하였다(2006년 기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는 직거래 유통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국내에서 도매 거래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직거래 비중이 높은 이유는 아직 도매업계의 기반이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병·의원이나 제약회사가 도매를 활용하고자 해도 국내에는 전국적인 영업 조직과 물류 기능을 갖춘 대규모 도매업체가 없어 도매 거래를 이용하는 데 많은 불편함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제약회사 영업사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문성이 떨어지는 도매업체 영업사원 또한 도매 거래 활성화의 장애 요인이다. 따라서 국내 제약회사들은 별도의 의약품 보관 시설이나 운송 시설을 가지고 소량, 다빈도, 중복 배송을 하면서 불필요한 재고관리 및 물류비용의 부담을 안게 되고, 도매업체들은 입지 약화로 투자를 통한 선진화에 어려움을 겪게 되어 제약산업 전체로 볼 때 유통 효율성이 저하되는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
영세 도매업체의 난립
현재 우리나라의 도매업체 수는 2005년 기준 약 1,100개가 등록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이 중 약 90%가 매출 규모 100억 이하의 업체들로 구성되어 있어 주로 영세한 규모의 업체들로 이루어져 있다(<그림 3> 참조). 이외에 설립 허가를 받지 않은 의약품 유통 중개인들도 다수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수의 도매업체가 활동하고 있다 보니 도매업체 간 경쟁이 과열되고,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영세업체는 안정적인 거래선을 확보하기 위해 각종 리베이트 위주의 판촉 활동에 주력한다. 그 결과 의약품 취급·보관·운반 등 도매업체의 전문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는 소홀하게 된다. 결국 도매업체의 역량을 불신하는 제약회사들은 도매업체에 낮은 유통 마진을 책정하고, 제약회사, 약국 및 병·의원과의 관계를 지속해야만 하는 영세 도매업체들은 이런 낮은 마진을 수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제약회사가 직거래를 할 경우 마진이 커진다는 점도 도매 거래의 활성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도매업체들의 수익 구조는 악화될 수 밖에 없고, 유통 정보화 등 선진 시스템에 대한 대비가 미흡하여 경쟁력이 약화되는 현상이 계속되는 것이다.
2. 최근의 의약품 유통 환경 변화
최근 의약 시장에 가장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요인 중 하나가 2007년 4월 체결된 한미 FTA 협상이다. 이미 2000년 의약분업 이후 다국적 기업들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왔으나, 이번 한미 FTA 협상을 계기로 제품력이 우세한 다국적 기업들의 시장 지배력이 한층 강화되는 방향으로 환경이 변화할 전망이다. FTA 협상 체결을 통한 의약품 특허 관련 제도의 변화와 더불어 2006년 실시된 약제비 적정화 방안 등 약가 제도의 변화는 국내 제약 및 도매업체들의 경쟁 압박을 더욱 심화시킬 것으로 예측되며, 그간의 영업 방식이나 유통 거래의 모습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들의 변화 또한 의약품 유통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의료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높아진 똑똑한 소비자들이 과거 의료 전문인에게만 의존하던 행태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의약품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편의성과 접근성을 문제 삼아 일반의약품의 수퍼 판매를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등 소비자들이 향후 의약품의 소매 유통 구조 변화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점에서 정부는 의약 시장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 국내 제약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통 관련 제도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의약품정보센터 설립 등을 통해 유통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불공정 거래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통해 산업 내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며, 더 나아가 유통 선진화 정책을 통해 불법 리베이트 등 약가 인상 요인을 감소시켜 약제비 급여 부담을 줄이고자 하고 있다. 이러한 혁신 정책은 그 동안 유사한 형태로 시행된 사례가 있으나, 여러 가지 장애 요인으로 인해 기대하는 만큼의 성과를 이루어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글로벌화가 가속되는 현재의 의약 시장 환경 하에서 정부뿐만 아니라 제약 기업(산업), 의료 전문인 등 관련 주체들이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어 앞으로 그 귀추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하 본 글에서는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 각국의 의약품 유통 현황을 유통 구조, 유통 정보화, 그리고 유통 관리 제도 등의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의약품 유통 산업이 변화하기 위해 선결되어야 할 과제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II. 선진국의 의약품 유통 현황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 국가들 또한 각국의 의료제도 및 처한 환경에 따라 독특한 유통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선진국들도 업체 간 경쟁에 의한 과열된 판촉 행위 등 우리와 공통적인 문제점들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일찍부터 정보시스템 마련을 통한 유통 거래 투명화, 업계 내 자정 노력, 정부의 엄격한 규제 등을 이용해 합리적인 유통 구조를 정착시켰다.
1. 미국
1) 유통 구조
미국의 경우 의약분업 제도가 일찍부터 정착되어 철저히 시행되고 있으며 의약품 유통 구조 또한 상대적으로 단순한 편이다. 의약품이 유통되는 단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도매상이나 각종 보험단체에 판매되어 약국이나 병·의원에 공급되는 경로와, 제약회사에서 바로 약국/병·의원으로 직거래되는 경로이다(<그림 4> 참조). 대부분은 도매상을 거쳐 유통되며, 우리나라와 같이 약국/병·의원으로 직거래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민간보험 중심의 의료제도를 갖고 있다. 따라서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등 민간보험 단체들은 의약품 거래에 있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보험단체들은 자체 위원회를 통해 수많은 의약품들 중 계약 품목을 선정하여 제약회사와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구입한 의약품을 약국 등에 공급한다. 소비자들은 보험단체와 계약한 약국에서의 구입 가격이 그렇지 않은 독립 약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에, 보험단체와 관련된 약국을 이용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PBM(Pharmacy Benefit Management)처럼 보험단체-제약회사-약국 등을 중개하며 계약 협상 등을 지원하는 비즈니스가 큰 규모로 성장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유통 구조 하에서 미국의 도매업체들이 담당하는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전체 의약품 유통 거래 중 도매업체를 경유하는 비율은 약 80%에 이르고 있으며, 이 중 대형 도매업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 또한 매우 높다(상위 3대 업체의 시장점유율이 90%). 이들 대형 도매업체는 미국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물류센터를 통해 전국적인 유통망을 보유하고 있으며, 각 지역의 지역도매업체, 소규모의 2차, 전문도매업체 등과 연계하여 의약품 유통 물량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소매 유통의 경우 다양한 의약품 소매상 조직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 의약품의 일반 소매점 유통이 금지되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CVS, Walgreen 등 Drugstore, Wal-Mart 등 할인점에서 다수의 의약품을 취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편 주문 배송 전문 업체(Medco Health Solutions 등), 인터넷으로 의약품을 판매·배송하는 업체(Drugstore.com)들도 다수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 의약품 시장에서는 다양한 유통 관련 주체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 중에서도 도매업체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그 이유는 대형 도매업체들일수록 협상력을 앞세워 할인된 가격으로 의약품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고객들에게 다양하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유통 정보화
미국의 대형 도매업체들은 제약회사-소매조직과 연계한 정교한 주문/배송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이 시스템을 통해 도매업체들은 제약회사는 적정 공급 양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소매조직은 의약품 재고를 최소화하도록 돕는다. 일찍부터 도입된 정보화 시스템을 통해 미국에서는 의약품의 유통 거래를 중개하는 다양한 IT 관련 기업들이 존재하고 있다(<그림 5> 참조).
그리고 의약품의 처방-주문/배송-판매-재고 관리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도입된 IT 시스템은 의약품의 유통 정보를 추적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유통 거래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의 강화를 위해 의약품에 전자태그(RFID: 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무선식별기술)를 도입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FDA는 2004년 RFID 부착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배포한 이후, 2006년 12월부터 모든 의약품 유통업자가 취급하는 의약품의 로트(Lot) 별 거래 기록을 유지해서 보고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의약품이 제조업체를 거쳐 약국에서 판매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불량한 품질의 의약품이 유통 과정에 끼어들게 되어도 추적할 방도가 없는 것이 그간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따라서 모든 의약품에 RFID를 부착하도록 의무화하여, 위조 의약품이나 FDA의 공식 승인을 받지 않은 외국산 의약품의 불법 유통을 방지하고자 하고 있다.
3) 유통 관리 제도
의약품 유통 거래의 투명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미국은 엄격한 유통 감시 제도를 통해 다양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의약품 유통업자들에게는 면허 요건을 요구하고 있으며, 유통업자들은 의약품의 거래 관리 기록을 유지하고, 정기적인 검사에 응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 유통업자뿐만 아니라 제약회사들도 의약품의 유통 공급에 있어 엄격한 규제를 받고 있으며, 단지 연방 리베이트 금지법 등 정부의 감시 관리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자정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그 예로 미국 제약협회의 ‘신 마케팅 강령’을 들 수 있는데, 이 강령에서는 접대 및 학회 후원, 물품 지원 등 제약회사와 전문 의료인 간 상호 활동에 대해 매우 세부적인 기준을 들어 규제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대형 도매업체를 중심으로 하여 안정되고 고도화된 유통 구조를 기반으로, 관련 주체들이 공정하고 투명한 유통 거래를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노력한 덕택에 전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의약품 유통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
2. 일본
1) 유통 구조
우리와 유사한 의료보장체계를 갖고 있는 일본은 의약품 유통 구조에 있어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도매업체를 통한 약국/병·의원으로의 도매 거래, 제약회사가 직접 유통하는 직거래 등이다. 그러나 일본 또한 미국과 마찬가지로 도매업체를 경유하는 도매 거래의 비율이 약 90%에 달하는 등, 도매시장 중심의 유통체계가 확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상황이 다르다(<그림 6> 참조).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의약품 시장에서 도매업체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유는 도매업계가 구조조정 노력을 꾸준히 지속하여 대형 도매업체를 육성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Big 3 도매업체의 시장점유율은 약 60%에 이르고 있다. 최근 일본 의약품 도매업체의 대형화 현상에서 주목할 점은, 단순한 인수합병이 아닌 지주회사 설립에 의한 계열화가 핵심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2007년 현재 일본은 약 120개의 도매업소들이 5개 지주회사로 합병되어 모두 계열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영세 도매업소들이 출자하여 지주회사를 설립하고, 지주회사는 계열사의 공동 구매, 제품 홍보 등의 역할을 하며, 지주회사에 출자한 도매업소들은 계열사의 자회사로 귀속되는 형태다. 이들 도매 지주회사는 MR(Medical Representative), MS(Marketing Specialist) 사원들을 양성하고 이들을 통해 제품 영업까지 담당하게 하여, 제약회사가 도매업체들을 거치지 않으면 유통이 용이하지 않을 정도로 일본 도매업체들은 의약품 유통에 있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일본 의약품 도매업계는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도매업체 간의 공동 협력 체제를 강화하여 업체 간 시장 경쟁이 과열되는 것을 막고 있으며, 그 결과로 불법 리베이트 제공 행위를 근절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
일본의 의약품 시장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다양한 소매조직이다. 아직 대부분의 소매 유통은 일반 약국이 담당하고 있으나 Drugstore Chain, 할인점, 편의점 등의 소매 조직이 발달되어 있다. 일반 소매 유통에서의 의약품 판매 허용은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업체로서도 사업 다각화 등을 가능하게 하여 경쟁력을 부여하는 제도가 되고 있다.
2) 유통 정보화
유통 정보화 측면에서는 2003년 정부의 주도로 e-Japan 전략 등을 발표한 이래로 물류 전반에 걸친 정보화 시스템 구축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의료 부문에서는 안전성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의약품·의료기기 등에 바코드(Bar Code) 및 IC 태그를 부착하는 등의 EBM(Evidence Based Medicine)을 확립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의약품 바코드 부착 등을 통한 생산추적시스템의 구축은 일본에서도 아직까지 뚜렷한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도 도입, 시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유통 관리 제도
정부의 엄격한 시책 또한 의약품 유통 질서 확립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리베이트의 제공, 불투명한 계약 관계 등 유통 질서가 문란하게 되는 원인은 제약회사와 도매업체의 과당 경쟁에 있다고 보고, 일찍이 1984년부터 ‘의료용의약품제조업 공정경쟁규약’ 등을 제정, 시행해 오고 있다. 규약에 의하면 지나친 가격 할인·할증을 억제하고 불법적인 경품이나 접대, 여행비 지원 등을 통해 의약품의 구매를 유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만약 업체가 약가 할인 등 규약을 어길 시에는 후생성이나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보험약가를 삭제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대응한다. 또한 제약회사들이 앞장서서 영업사원 교육 등을 통해 불법적인 고객유인행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부당한 요구를 해 오는 의료기관들에 대한 계도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III. 국내 의약품 유통 산업의 과제
미국과 일본 등 선진 의약품 시장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유통이 선진화된 국가일수록 도매 거래 체제가 잘 구축되어 있고, 공정한 거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제약회사, 도매업체, 의료 전문인, 감시 관리 기관 간의 협력과 자정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 국가에서도 과열된 경쟁으로 인한 불법적인 고객 유인 행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통정보 시스템 구축 등을 통한 유통 투명화 작업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국내 의약품 유통 환경 또한 업계 내 변화 노력과 관련 제도 개선을 통해 보다 합리적이고 현대화된 모습으로 변화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도매업체의 대형화 및 도매 기능의 고도화
현재 국내 의약품 유통 구조에서 가장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부분은 도매업체의 영세성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국내의 의약품 유통 과정에서 도매업체를 경유하는 비율은 약 48%에 불과하며, 매출 Top3 업체의 점유율은 18%에 그칠 정도로 도매의 역할이 작고 대형 도매업체가 부재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첨단 시스템과 대규모 물류 센터를 보유한 외국의 전문 업체들이 국내 의약품 유통 시장을 잠식해 나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따라서 앞으로 국내 도매업계가 살아남으려면 선진 사례에서 본 것처럼 업체 간 업무·자본 제휴, 자회사화, 인수합병 등을 통해 자체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대형화와 함께 과거 의약품 도매라는 단순 기능에서 벗어나 도매업체들이 보다 복합화되고 종합적인 기능을 갖추려는 노력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국내 도매업체들은 아직도 제품의 구매, 배송, 수금 등 수동적이고 단순한 활동만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향후 의약품 유통에서 도매업체들이 생존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의약품의 선택 및 가격 유지, 영업·마케팅 활동, 병·의원의 업무 지원 서비스 제공 등 보다 종합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성격으로 역할을 진화시켜 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선진 대형 도매업체들은 의약품 물류뿐만 아니라 종합 IT 시스템 지원 등 복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미국의 종합도매유통업체 Cardinal Health가 대표적인 사례이다(<BOX> 사례 참조).
유통 정보화의 구축
의약품 유통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유통 정보화라고 할 수 있다. 의약품 유통에서의 정보의 수집 및 관리는 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유통에 소요되는 제반 비용을 절감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다음 페이지의 <BOX> 참조). 아직 국내 의약품 유통 거래에서는 전산 매체를 이용한 자료 수집 및 관리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고 있으며, 정보 공개가 매우 소극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유통 정보의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미 1998년 보건복지부는 의약품 납품 비리 근절을 위해 의약품 유통개혁방안을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약품 유통정보시스템(헬프라인)과 의약품 물류센터 건립을 통해 의약품 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의약품 물류를 일원화시키려 했다. 유통되는 모든 의약품에 바코드를 인쇄, 공장 생산에서 약국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투명화해 비리의 근거를 봉쇄하는 동시에 그 동안 요양기관을 통해 지급하던 약제비를 보험공단에서 공급자인 제약회사에 직접 지급하는 직불제를 통해 제약회사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의료기관이나 약국 등에서 결사 반대하여 사업이 좌초되고 말았다.
이처럼 과거 의약품 유통 정보화를 위한 비슷한 시도가 실패로 끝난 데는 인센티브제 실시 등 다양한 참여 방안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주체들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하루빨리 유통 정보화 시스템이 안착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제약회사, 도매업체, 의료기관, 약국 등 관련 주체의 자발적인 참여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리·감시 기관들의 실사를 비롯, 소비자들의 불법 유통 거래에 대한 비난 움직임 등 예전과 달리 유통 거래에 대한 변화 압력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관련 주체들 또한 더 이상 참여를 기피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공정경쟁 관리체제의 강화
의약품 유통 거래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와 제약협회 등 관련 주체들은 유통 정보화뿐 아니라 다양한 제도 마련을 통해 유통 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공정 행위를 지속적으로 감시, 관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미 2005년 국가청렴위원회의 주도로 ‘의약품 리베이트 수수 근절을 위한 제도개선 권고’ 등을 통해 의약품 리베이트를 근절하기 위한 제도 개선안에 대해 논의한 과거가 있으며, 같은 해 보건복지부는 의사협회, 병원협회, 시민단체 등과 함께 ‘보건의료분야 투명사회협약’을 체결하여 의약품 유통 과정에서의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 질서를 확립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법 유통 거래에 대한 감시 관리체제는 그다지 실효성을 나타내지 못했다.
지난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약회사 리베이트 실사 발표만 하더라도 유통 관련 비리를 저지를 경우 엄청난 과징금을 부과하는 등 전에 없던 강력한 조치가 시행되긴 하였으나, 조사와 처벌이 일부 제약회사에만 한정되어 충분한 효과를 거두는 데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제약회사뿐만 아니라 리베이트를 수수한 의료인에 대한 조사도 병행시켜, 불공정 거래를 하다 적발될 경우 제약회사나 의료 전문인 모두 엄격한 처벌을 받도록 감시 체제를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소비자를 대표하는 시민단체에서도 불공정 거래를 줄이고 유통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측면에서 불공정 거래에 대한 엄격한 조사와 처벌에 대해 강하게 주장하고 있으며, 관련 주체들 사이에서도 자정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향후 감시·관리 체제는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의약품 소매 유통 조직의 확대
이외에 국내 의약품 유통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요인으로 약국 관련 규제 완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유통업계를 위시한 재계 일각에서는 일반의약품의 소매점 판매 허용, 약국 법인의 일반인 참여 등 약국과 관련된 규제 개혁에 대해 꾸준히 건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약사회 등 직능단체에서는 의약품 오·남용에 따른 부작용 발생 등을 이유로 들어 일반 소매점의 의약품 유통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처럼 의약품 소매 유통 채널의 확대를 둘러싼 논란이 정점에 이르고 있어 향후 그 방향성에 대해서 섣불리 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 과연 어느 시점에서 일반의약품의 소매 유통이 허용될 지에 대해 예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일반 소비자들의 불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고, 의약품 사용에 대한 국내 소비자들의 성숙도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을 볼 때, 의약품 소매 유통 채널의 확대는 단계적으로라도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살펴본 미국과 일본의 사례 또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이미 직접적 이해 관계자인 약사 단체에서도 이의 가능성에 대해 일부 인정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국내에 진출한 Drugstore들은 의약품보다는 주로 Health & Beauty Multi-Shop의 역할에 치우치고 있으나, 의약품 소매 유통 조직이 좀더 다양화되면 Drugstore의 의약품 취급 비중도 보다 높아질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의약품 소매점의 형태는 이미 등장한 Drugstore를 중심으로 하여, 할인점·편의점 등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IV. 시사점
의약품 유통 환경의 변화는 국내 제약산업의 경쟁력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비즈니스의 기회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여 제약산업을 포함한 Healthcare 산업 전체의 영역을 보다 확대하는 데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다양한 의약품 소매 유통 관련업체의 등장이 예고되고 있으며, 유통 거래의 정보화가 진전되면서 다양한 Healthcare-IT 관련 사업이 생겨날 것으로 예상된다. 더 나아가 아직 시기상조이긴 하나 의료 제도의 변화와 함께 민간보험의 역할이 확대된다면 향후 PBM과 같은 보험-제약회사-의료기관 중개업체가 국내에도 등장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향후 등장할 의약품 유통 관련 비즈니스에는 단지 제약업계 내부의 관련 주체들뿐 아니라 유통업, IT 서비스업, 전자통신업체 등 다양한 기업들의 참여가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되므로,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가 기대된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국내 의약품 유통 환경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제약회사, 도매업계 등 내부적인 필요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한미 FTA 등 외부 환경의 압박 또한 변화의 속도를 가속시키고 있다. 한미 FTA와 같은 외부적인 압력뿐 아니라 정부의 주도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의 실시 등 제약산업 전체를 관통하는 큰 변화가 이미 진행 중이다. 그러나 유통 구조 개혁을 위한 적극적인 변화 요구에 대해 관련 업계는 동조의 뜻을 표명하고 있으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많은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오랜 기간 동안 굳어져 온 관행을 하루아침에 변화시키는 데 따른 부담감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관련 업체들이 급속한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미 역량이 취약한 중소 규모의 업체들은 생존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이 되고 있으며, 향후 이러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다. 따라서 관련 주체들은 유통 환경의 변화를 올바로 인지하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여 전문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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