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제조 강국 독일과 일본, 명암이 엇갈린 이유'
금융위기 이후 독일은 ‘슈퍼스타’가 된 반면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 ‘잃어버린 20년’으로 연장되었다. 제조업 강국인 양국의 수출에서도 독일은 2010년 이후 금융위기 전 수준을 회복하며 순항하고 있지만 일본은 불황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환율 등 경제환경이 금융위기 후 일본 제조업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2000년대 이후 일본 제품의 수출 경쟁력은 지속적으로 독일 제품에 비해 약화되어 왔다. 세계 수출 시장에서 독일 제품은 중국 등 후발 주자들의 공세에도 일정한 점유율을 유지한 반면 일본 제품의 점유율은 하락을 계속했다.
독일 제조업이 수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산업용 기계, 자동차와 같이 숙련을 요하는 전통 산업 분야에 특화되어 있던 산업 구조를 들 수 있다. 일본 제조업은 기계, 자동차 이외에 전기전자산업의 비중도 컸다. 한때 일본의 주력 수출 산업이었던 전기전자 부문은 과거 일본이 독일을 넘어서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2000년대 이후 선진국, 신흥국 모두에서 후발 주자들에게 시장 점유율을 빼앗겼다. 반면, 독일은 숙련과 암묵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산업용 기계, 자동차 산업에 더욱 특화한 덕분에 축적된 숙련 기술과 명성으로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노사 협조에 기반한 노동 비용 상승 억제 노력과 동유럽과의 상호적 생산 네트워크 구축도 독일의 경쟁력 유지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독일 제조업은 주력 산업인 산업용 기계, 자동차 부문에서 신흥국 수요에 힘입어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좀더 장기적으로 보면 독일도 언제 시장 축소나 경쟁력 약화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 과거 독일, 일본의 사례로 보면 우리 제조업의 현재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 될 것이다. 특히 변화의 속도가 빠른 우리나라 주력 산업의 특성을 고려할 때 우리 경제의 경쟁력과 지속가능성을 향상시키는 길은 지속적으로 혁신하고 변화하는 길밖에 없어 보인다.
< 목 차 >
1. 독일, 일본 경제의 명암
2. 시장 점유율로 본 양국의 경쟁력
3. 독일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 배경
4. 시사점
1. 독일, 일본 경제의 명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차이 뚜렷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독일은 흔히 ‘유럽의 병자’(the sick man of Europe)로 불렸다. 낮은 성장률, 높은 실업률, 대규모 재정 적자 등 풀어야 할 문제들이 산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8년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독일 경제를 묘사하는 단어는 ‘기적’(job miracle), ‘슈퍼스타’(economic superstar), ‘불사조’(phoenix) 등으로 바뀌었다. 독일 경제는 2009년 -5.1% 성장이라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최악의 불황을 겪었으나 2010년 곧바로 회복하였고 그 후 EU 평균보다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독일 경제의 회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제조업 중심의 수출이다. 2009년 크게 하락한 수출은 2010년부터 상승세로 돌아서서 2011년 위기 전 수준을 회복한 후 순항하고 있다(<그림 1> 참조, 물량 기준). 이에 힘입어 경상수지 흑자는 GDP의 6~7%를 유지하고 있고 제조업 생산지수는 2011년 중반에 위기 전 수준을 회복하였다. 유럽 재정위기의 여파로 최근 증가세가 둔화되기는 하였으나 2014년에는 수출이 다시 독일 경제의 성장률을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독일이 슈퍼스타로서 세계의 이목을 끄는 동안 한때 쌍벽을 이루던 제조업 수출 강국 일본은 경쟁력 약화로 신음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을 대신해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이다. 일본 수출은 2010년 큰 폭으로 늘었으나 이후 주춤하여 2013년에도 위기 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였다(<그림 1> 참조, 물량 기준). 제조업 생산지수는 위기 전 최고 수준의 80%대에 머물러 있으며,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는 1% 밑으로 떨어졌다. ‘아베노믹스’의 효과로 최근 내수가 진작되면서 경제지표가 일부 개선되고 있으나 엔화 약세에도 수출은 기대한 만큼 늘지 않고 있다.
우리 나라가 이들과 마찬가지로 제조업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기 이후 양국의 엇갈린 행보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수출의 확대, 정체, 감소는 결국 그 나라 제조업의 경쟁력의 문제이다. 독일 제조업은 어떻게 일본 제조업과 달리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2. 시장 점유율로 본 양국의 경쟁력
금융위기 후 경제환경, 일본에 불리
글로벌 금융 위기 후 최근까지 양국 제조업을 둘러싼 경제환경은 상대적으로 일본에 불리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달러 대비 환율의 추이를 살펴보면 유로화의 가치는 2008년 상반기까지의 상승세에서 하반기부터 하락세로 돌아섰다. 반대로 엔화는 위기 발생 전에는 100~110엔대의 약세였으나 그 후 2012년 중반까지 꾸준히 가치가 상승했다. 2008년 리만 쇼크 전후의 이 같은 반전은 엔화, 유로화의 상대가치 추이에서 뚜렷이 관찰된다(<그림 2> 참조). 위기 이전에는 유로화 대비 엔화가 약세였지만 위기 이후에는 유로화 대비 엔화가 강세였다.
환율 이외의 악재도 있었다. 2011년 3월에는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 내 서플라이 체인을 마비시키고 경기 회복세에 찬물을 끼얹었다. 제조업 생산지수는 일시 큰 폭으로 하락하였고(<그림 3> 참조) 그 해 일본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다. 지진의 영향으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에너지 문제가 현재까지 국가 경제와 기업 활동에 애로가 되고 있다. 이에 더해, 2012년에는 동중국해에서 중국과의 영토 마찰이 발생하여 중국 내에서 일본 상품 보이콧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독일 경제에도 악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2년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는 독일 제품의 안방인 EU권을 마이너스 성장에 빠트렸다. 독일 수출의 60%를 차지하던 EU내 수출이 타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 해 독일 경제는 중국을 비롯한 EU밖 국가들의 수요에 힘입어 GDP 0.7% 성장을 기록하였다. 독일 수출 중 중국 비중은 2007년 3%에서 2012년 6%로 상승하였으며 중국은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영국에 이어 독일의 제5위 수출 상대국이 되었다. 중국 외의 BRICs 국가들도 위기 후 무역상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높였다.
이처럼 위기 후 경제 환경은 상대적으로 독일보다 일본 제조업에 불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제조업 위기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200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일본 제품의 수출 경쟁력이 독일 제품에 비해 약화되어 왔던 사실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이후 일본 제품의 상대적 수출 경쟁력 지속적으로 약화
수출 경쟁력을 측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유력한 한 가지 방법이 세계 수출입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비교하는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독일, 일본 제품의 점유율을 비교해보면 환율 추이와는 별도로 일본 제품의 경쟁력 약화, 독일 제품의 경쟁력 유지라는 흐름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에서 2012년 사이에 세계 수출액에서 일본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7.8%에서 4.7%까지 떨어졌다. 반대로 독일은 9% 내외의 비중을 유지하였다. 독일의 안방인 EU권을 제외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비중이 10.5%에서 6.3%로 떨어지는 동안 독일의 비중은 6%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그림 4> 참조).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의 수출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양국 제품의 점유율은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G2라 불리는 미국과 중국에서도, 일본의 텃세가 강한 아세안 국가들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금융위기 이전 기간에 유로화 가치는 꾸준히 상승한 반면 일본은 장기적인 엔화 약세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2000년 이후의 독일 제조업의 점유율 유지, 일본 제조업의 점유율 하락이라는 장기적인 흐름은 환율 효과와는 별도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해당국과 주요 무역상대국의 물가, 환율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지표인 실질실효환율의 추이를 보더라도 위기 전에는 일본이 독일보다 유리하였다(<그림 5> 참조). 따라서 가격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인, 즉 비가격 경쟁력 또는 구조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화 약세에도 독일과 일본의 수출실적 격차가 지속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 독일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 배경
독일, 숙련을 요하는 전통 산업 분야에서 경쟁력 유지
중국 등 후발 주자들의 공세에도 독일 제조업이 수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숙련을 요하는 전통 산업 분야에 일본보다 더 특화되어 있었던 산업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산업용 기계와 자동차 산업이 바로 그러한 산업이다. 일본 역시 이들이 주요 수출산업이었고 현재도 그러하지만, 2000년대 초에는 그에 못지 않게 전기전자산업의 수출 비중도 높았다.
예컨대, 각국 제품의 치열한 경쟁의 장인 미국 시장에서 2000년 일본의 수출품 중 42%가 산업용 기계와 자동차 부문이었고 31%가 전기전자 부문이었다. 같은 해 독일 수출품 중에서 두 부문의 비중이 각각 48%, 9%였던 것과 대비된다. 2012년의 비중은 독일의 경우는 2000년과 거의 차이가 없었으나 일본의 경우는 각각 53.9%, 16.2%가 되어 전기전자 부문이 줄고 산업용 기계와 자동차 부문이 늘었다. 전기전자 부문에서 일본 제품의 점유율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며(<표 1> 참조) 이것이 일본 제품 전체의 점유율이 하락한 주 요인이었다.
전기전자산업에 비한다면 산업용 기계와 자동차 분야에서는 독일, 일본 제품 모두 미국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유지하였다. 특히 자동차 및 부품은 양국 모두 주력 대미 수출품으로 2012년 독일 대미수출의 27%, 일본 대미수출의 34%를 담당하였다. 승용차의 수입 단가를 비교해보면 독일차가 일본차의 1.7배(2012년)여서 아우디, BMW, 벤츠 등 고급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독일 자동차업계의 경쟁력을 엿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이 우려되던 배경이 바로 전기전자산업에서 일본의 약진이었다. 현장 교육과 직업학교 교육을 병행하는 기술 훈련 체계인 독일의 ‘듀얼 시스템’(dual system)이 현장에서의 숙련 기술 축적과 전달에는 뛰어나지만 외부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도입하는 데는 뒤쳐진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만큼 전기전자산업은 후발 주자들의 추격이 거센 분야이고 이제는 일본이 중국, 한국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그에 반해 산업용 기계 제조에는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축적된 암묵적인 지식(implicit knowledge)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비로소 원하는 성능을 발현시킬 수 있는 자동차 산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단위 가격이 높은 내구재이기 때문에 축적된 명성(reputation)의 역할도 크다. 독일과 일본은 해당 산업의 역사가 길 뿐만 아니라 각각 듀얼 시스템과 연공서열제에 기초한 사업장내 훈련을 통해 숙련 기술을 축적해 왔다. 따라서 이들 분야는 중국과 같은 후발주자들이 추격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요컨대, 1970년대 이후 일본과의 치열한 경쟁 관계 속에서 독일 제조업이 숙련을 요하는 전통 산업인 산업용 기계, 자동차 등에 일본보다 더욱 특화된 수출 상품 구조를 가지게 되고 이 분야에 역량을 집중한 것이 경쟁력 유지의 비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일본 제조업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자동차, 산업용 기계 등에서는 경쟁력을 유지해 왔으나 또다른 수출의 축이던 전기전자 부문에서 경쟁이 격화되어 점유율이 축소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순항하던 2007년까지는 독일, 일본의 제조업 생산지수가 모두 상승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경제에 점유율 축소의 고통이 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이후 축소된 세계 시장에서 제조업 수출국들의 경쟁이 거세진 데다 환율 조건마저 불리해지자 제조업 경쟁력 저하가 일본 경제에 훨씬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흥국 시장 개척에서도 독일 제조업이 앞서
떠오르는 신흥국 중국 시장에서도 전기전자 부문이 일본 제조업의 발목을 잡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2000년 일본의 대중 수출품 중 전기전자 부문의 비중은 29%(산업용 기계와 자동차 부문은 16%)였고 중국 시장에서의 점유율도 높았다. 하지만 2012년이 되면 점유율이 크게 떨어진다(<표 2> 참조). 중국 내 생산의 증대와 대만, 한국 제품의 공세에 따른 것이었다. 반면, 세계의 공장인 중국으로의 전기전자 부품 수출이 활발한 탓에 2000년 독일 수출품 중에서도 전기전자 부문의 비중은 19%로 높았으나 34%를 차지한 산업용 기계, 자동차 부문에 미치지 못하였다.
중국 시장에서 특징적인 점은 자동차 시장에서도 일본의 상대적인 경쟁력이 저하했다는 것이다. 수입 승용차 시장에서 독일차와 일본차의 점유율은 2008년 각각 32%, 29%로 비슷하였다(달러 기준). 하지만 2012년에는 각각 38%, 22%로 벌어졌다. 2012년 동중국해에서 벌어진 중일간 영토 갈등으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점유율 격차는 그 전부터 이미 커지고 있었다. 엄청난 성장세를 보인 시장에서 일본 제품이 경쟁력 유지에 실패한 반면 독일 제품은 경쟁력을 향상시켰던 셈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 업계 스스로도 “본격적인 중국 시장의 확대기에 개발 생산 체제와 상품투입의 대응에서 뒤쳐졌다”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중국 소비자들이 상대적으로 독일차가 가진 크고 화려함에 이끌리는 특징이 있기도 하지만, 이러한 점 이외에도 예컨대 폭스바겐이 일찍부터 현지에 개발센터를 두고 중국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는 상품을 투입한 데 비해 일본 제조사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 자동차 업계도 최근에는 늦었지만 중국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금융위기 전 유로화 강세 시기 독일 제조업의 비용 절감 노력
그렇다고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을 수출 상품 구조에서만 찾는 것은 2000년대 초중반 독일 경제계가 기울였던 노력을 과소평가할 가능성이 있다. 제품 경쟁력을 가졌다고는 하나 독점이 아닌 이상 시장 점유율이나 기업 수익은 가격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단기적인 조건인 환율면에서 유로 통합 이후의 유로화 강세는 분명히 독일 경제에 작지 않은 위협이었다.
실제로 2000년대 초중반 많은 독일 기업들이 고비용을 피해 인접한 동유럽 지역으로의 공장 이전을 추진하였다. 2004년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은 ‘메이드 인 저머니여 안녕’(Bye-bye “made in Germany”)이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 기사는 오펠, 폭스바겐 등 독일 주요 자동차 메이커의 생산 기지 이전과 그에 따른 노동조합과의 충돌을 다루었다.
이처럼 어려웠던 시기에 독일 기업과 노동자들은 고용 유지를 최우선시하는 대신 노동 비용을 절감하는 형태의 타협을 이루어 경쟁력 약화 또는 기업 수익 악화 억제를 위해 노력하였다. 독일 산업계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노사 협조주의가 그러한 타협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독일의 생산성 대비 노동 비용 상승은 다른 EU 국가들에 비해 낮게 억제되었다(<그림 8> 참조).
저임금 지역인 동유럽 국가들이 인접해 있는 것이 독일 노동 비용 상승을 억제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학자 더스트만 등은 올해 초 발표한 논문에서 동유럽으로의 생산 기지 이전이 시행 여부를 떠나 가능성만으로 독일 경제의 노동 비용 상승 억제와 노동 유연화에 기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노사 협조주의의 전통이 있었다고는 하나 상대적으로 노동자에게 불리한 타협과 개혁이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자리마저 잃을 수 있다는 노동자들의 우려가 깔려있었다는 논리이다.
독일과 동유럽의 상호적 생산 네트워크
저임금 지역으로의 생산기지 이전은 선진국 제조업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이고 일본도 다르지 않았다. 사실 미국 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점유율이 하락한 이유 중 하나도 일본 기업들이 중국, 동남아로 완성품 제조공장을 이전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초기에 완성품 제조공장이 이전하면 해당국의 완성품 수출은 줄어드는 대신 부품 수출이 늘어나게 된다. 해외에서 발생한 영업 이익으로 소득 수지도 상승한다. 그런데 일본 전기전자산업에서는 특히 금융위기 후 부품 수출마저도 줄어들었다(<그림 9> 참조). 전반적인 경쟁력 하락의 영향도 있었지만 엔화 강세에 따라 부품도 현지에서 생산조달하는 형태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소득 수지는 늘어나나 무역 수지는 악화되고 국내 제조업 기반이 잠식당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론 상으로는 역의 관계, 즉 싼 부품을 수입해 해당국 내 완성품 제조 부문의 경쟁력을 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제조업 ‘공동화’의 우려는 줄고 저임금 지역과의 생산 네트워크 구축이 해당국 내 제조업의 경쟁력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독일과 동유럽 사이에 구축된 상호적 생산 네트워크가 관심을 끈다. 비교가능한 자동차 산업을 예로 들면 자동차 부품의 수출입에서 일본은 수출 위주인 반면 독일은 수입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표 3> 참조). 즉, 일본 자동차 산업은 해외의 완성차 생산기지에 부품을 공급하는 네트워크는 발달했으나 외부로부터 부품을 공급받는 네트워크는 발달이 더딘 것이다.
동유럽은 독일내 부품 제조업의 시장(완성품 생산기지)이 되는 동시에 완성품 제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역할(부품 생산기지)도 한다. 2012년 독일은 동유럽 5개국에 52억 달러의 자동차와 93억달러의 자동차 부품을 수출했다. 그 대신에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88억 달러의 자동차와 133억 달러의 자동차 부품을 수입했다. 독일의 자동차 부품 수입 중 이들 국가의 비중은 2000년대 들어 20%에서 40%까지 올라갔다. 이는 지리적 근접성과 비슷한 문화적 특성과 숙련도를 가진 노동력의 존재에 기인한다.
최근에는 폭넓은 생산네트워크 자체가 가지는 혁신력도 중시되고 있다. 일본의 one-set 형(국내에 모든 산업을 완비) 전략의 문제점으로 외부와의 소통 부족이 혁신력을 떨어뜨리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상호적 네트워크 하에서 독일 기업들은 연구개발센터도 동유럽에 구축하여 혁신력을 끌어올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4. 시사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독일 제조업은 산업용 기계, 자동차 등 특화 산업에서 경쟁력을 축적하여 글로벌 수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거기에 고용 안정이라는 공동의 목표 하에 정부, 기업, 노동계의 협조로 진행된 노동 비용 상승 억제 노력, 그리고 인접한 동유럽과의 상호적 생산 네트워크 구축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본은 주력산업 중 하나였던 전기전자산업, 특히 ICT 분야에서 후발 주자에게 밀리거나 기업들이 대거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함에 따라 국내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이 약화되고 말았다. 최근 일본 전기전자산업에서 진행된 사업 구조조정도 이러한 맥락에서 전개된 것이다.
독일 제조업의 주력 산업인 산업용 기계, 자동차는 숙련이 중시되는 전통 산업이면서 당분간 신흥국 수요에 힘입어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기대되는 분야이다. 중국, 한국과 같은 후발 주자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독일 기업의 경쟁력이 단시일내로 약화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자동차 분야에서는 폭스바겐의 새로운 혁신인 ‘모듈화’가 주목을 끌고 있다. 폭스바겐이 시도하고 있는 모듈화는 몇 가지 모듈군(modular toolkit)을 통해 다양한 차종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신차 개발 비용과 부품 조달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품질을 유지 또는 향상시키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폭스바겐은 이를 통해 도요타를 제치고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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