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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경제연구원 '독일 통일로 본 통일 경제의 주요 이슈'

한국 경제의 미래를 생각할 때 통일 변수를 빼놓을 수 없다.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경제가 어떤 모습을 띨 것인지는 통일의 방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 글에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지지하는 점진적인 경제통합 혹은 한시적 분리를 전제로 논의를 전개한다. 독일의 경험을 참고하여 통일경제가 안정을 찾아가는 통일 초기, 예컨대 10년 정도의 기간 동안 우리 거시경제의 향방과 관련된 주요 이슈들을 짚어보았다.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 첫째, 중장기적으로는 성장효과가 기대된다고 해도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만큼 초기 금융시장 불안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국가신용등급이 크게 훼손되지 않을 정도로 재정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조기 진정의 관건이 될 것이다. 둘째, 매우 큰 남북한 경제력 격차를 줄여나가는 과정에서 일정 정도 재정구조가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에 대한 소비성 이전지출을 억제한다든지 민간자본 및 외국자본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등 재정악화 정도를 줄이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셋째, 대북투자는 매우 활기를 띨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지리적 이점과 임금경쟁력, 그리고 동독의 경우와 달리 체제이행 경쟁국이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대북투자 붐이 일면서 한반도의 분업적 산업구조가 형성돼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넷째, 대북투자 증가로 경상수지 악화압력은 가중되겠지만 북한의 생산 정상화에 따라 독일의 경우에 비해 경상수지 악화압력이 빠르게 완화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불안까지는 아니겠지만 물자부족과 화폐과잉 등으로 북한지역의 물가는 일정 정도 오를 가능성이 높다. 

장기적으로 한반도경제가 시너지효과를 발휘해 높은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는 데 대다수 연구기관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렇지만 단기적으로, 중기적으로는 거시경제상황이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통일과정의 불확실성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 서독처럼 남북한 경제통합의 충격에 크게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강건한 경제력을 확보하는 일이 필요하다. 재정 및 경상수지의 건전성 확보도 통일을 대비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 목 차 > 

1. 독일 통일의 경험
2. 독일 통일과의 차이점
3. 남북한 통일 시 예상되는 주요 경제이슈 
4. 시사점
 
  

우리나라의 미래와 관련해 통일은 가장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다. 최근 우리 경제가 활력을 잃어가면서 더욱 관심이 쏠리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통일 관련 연구는 주로 국제정치적 접근이 주를 이뤘으나, 독일 통일의 과정을 목격하면서 남북한의 통일비용을 포함한 다각적인 연구가 이어졌다. 지난해 초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이 제기된 이후에는 통일비용의 조달방안 등 이전보다 구체적인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그렇지만 거시경제적 측면에 관한 연구는 통일경제의 비전을 제시하는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통일이 인구고령화와 투자부진 등 내수한계로 애로를 겪고 있는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넓혀준다는 것이다. 인구 8천만의 한반도 경제가 시너지를 발휘, 빠르게 성장함으로써 동북아 경제의 핵심국가로 발돋움해 세계 7위의 경제 강국이 될 수 있다는 식이다. 

독일 통일의 경제성과 연구도 주로 동독경제의 성장에 대해 이뤄졌으며, 서독 경제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동독 발전에 따른 동서독 간 경제수렴이 통일 독일의 최우선 과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일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는 서독의 경제적 여건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특히 남북한은 경제력 격차가 매우 크다는 점에서, 통일 후 남한 경제의 상황에 따라 통일의 성패가 판가름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독일 통일의 경험을 당시 서독 및 통일독일의 관점에서 재정리하고, 통일 이후 우리 거시경제가 직면할 주요 이슈들의 방향성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통일이 이뤄질 경우 안정을 찾아나가는 예컨대 통일 후 초기 10년간 금융시장 환경과 재정, 경상수지와 환율 등 주요 거시변수들은 어떤 모습을 띨 것이고 거시경제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적 준비가 필요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러한 작업은 물론 통일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극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1. 독일 통일의 경험 - 서독을 중심으로 
  

동서독 모두에게 통일의 과정은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당시 세계 4위 경제대국 서독에게도 동독 경제의 재건과 동서독 통합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동독은 당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는 나은 편에 속했지만,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경쟁력을 가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전반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시기에 따라 동독과 서독이 직면하는 경제상황은 달랐다. 경기침체를 경험한 시점도 다르고, 그 이후의 성장 패턴도 차이를 보였다. 이 장에서는 통일 후 독일 경제를 살펴보는 가운데, 지금까지 덜 다루어졌던 서독지역의 상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통일 이후 남한지역 경제에 대한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 

통일의 영향권에 대해서는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로 보는 견해에서부터, 1990년대 후반에 이미 벗어났다고 보는 견해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여기서는 2000년대 이후 동서독간 경기 동조화를 동독 재건 및 경제통합이 진전된 결과로 보고, 1990년 통일 이후 약 10년간을 통일의 직접적 영향권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이 기간은 다시 1990년 통일 이후 동서독이 차례로 경기침체를 겪었던 통일 충격기, 1990년대 중반 진통 속에서도 통일독일의 새 판을 짜던 구조조정기, 그리고 1990년대 말 우호적 대외여건에 힘입어 통일의 충격에서 벗어났던 안정화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그림 1> 참조). 

(1) 통일의 충격 1 (1989~1991) : 동독은 급락, 서독은 호황 

동독, 취약한 경쟁력 및 노동력 이탈로 생산기반 붕괴 

1980년대 말 들어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방과 개혁노선으로 선회하자 동독 내부적으로도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되었고 경제는 거의 파탄에 이르렀다. 이에 서독은 통일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애초 서독은 동독 경제의 안정과 자립을 돕는다는 입장이었지만,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상황이 급변하자 조기 통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1990년 7월, 정치적 통일에 앞서 경제통합이 이루어졌다. 서독 마르크(DM)를 유일한 법정통화로 인정한다는 전격적 통화통합이 이뤄졌고, 단일경제질서 도입 및 가격자유화 등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는 동독경제에 대한 일말의 믿음과, 통일을 통해 정치 기반을 공고히 하려던 당시 서독 콜 수상의 입장이 맞물린 결과였다. 그러나 막상 통일 후 파악한 동독 경제는 서독의 예상보다 훨씬 취약했다. 동독 산(産) 제품은 조악했고, 경쟁에서 밀려난 기업들은 줄줄이 파산에 이르렀다. 일자리를 잃은 동독 주민들은 서독으로 향했다. 주로 청년층을 중심으로 이뤄진 인구감소는 동독의 생산기반을 빠르게 무너뜨렸다. 

서독은 동독 수요 증가 및 건설투자 확대로 경기 호조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서독 경제는 큰 호황을 누렸다. 1980년대 평균 2%를 하회하던 서독 성장률은 1988년부터 3%대로 올라섰고, 통일 이후에는 약 2년간 5% 이상 성장했다. 1970년대 이후 가장 높은 성장률이었다(<그림 2> 참조). 

이 당시 서독의 호황은 동독의 생산기반 붕괴에서 비롯된 통일 특수의 성격이 짙었다. 특히 동독 인구 유입의 영향이 직접적이었다. 서독 내의 소비 인구가 늘었으며, 그들에게 주거지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건설투자도 증가했다. 동독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서독의 생산이 증가한 측면도 컸다. 동독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동독 주민들의 구매력을 높여준 것이 오히려 서독 제품에 대한 수요를 늘리는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독이 통일비용을 과소평가한 영향도 있었다. 적극적인 재원 조달의 필요성을 간과하면서 통일비용 문제로 인한 경기둔화 압력은 약 1~2년 가량 뒤로 늦춰지게 된다. 

(2) 통일의 충격 2 (1992~1993) : 서독의 부담 가시화, 동독은 혼란 감소 

통일 직후 동독의 큰 혼란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소 누그러졌다. 동독 경제의 재건은 여전히 시작단계에 불과했지만, 인구 유출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동독 경제는 건설투자를 중심으로 서서히 반등하기 시작했다(<그림 3> 참조). 여기에는 무엇보다 고임금 및 복지정책으로 서독으로의 이주 유인이 줄어든 것의 영향이 컸다. 서독생활 적응에 실패한 동독 주민들이 다시 동독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동독의 인구 순유출을 줄였다. 동독 주민들의 부적응은 이후 오랫동안 독일의 발목을 잡는 문제였지만, 당시로서는 이것도 동독경제의 붕괴를 막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 시기 어려움에 빠진 것은 서독이었다. 동독 주민의 이주가 줄어들고 동독 경제가 안정을 찾자 서독의 통일 특수도 사라졌다. 인구 유입에 따른 소비 및 건설투자 증가세도 멈췄다(<그림 4> 참조). 동독에 대한 투자 증가는 서독 내의 투자여력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호경기 동안 높아졌던 서독의 임금수준이 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통일비용의 부담도 본격화됐다. 당초 서독 정부는 동독의 자산을 매각한 대금과 통일 독일의 발전으로 늘어날 세금을 통일비용의 주요 재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독의 설비는 서독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에 매각하기에는 너무 낙후되어 있었고, 세수가 늘기에는 경기침체의 골이 너무 깊었다. 예상보다 재정부담이 커지자 서독은 증세를 단행했다. 1991년 7월 연대부가세(Solidaritatszuschlag) 도입을 시작으로 1993년에는 부가가치세 등 세율 인상을 단행했다. 또한 채권 발행을 늘리는 한편 금리인상을 통해 해외자본 유입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서독 주민과 기업들의 세금 및 금리 부담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서독의 내수 위축으로 이어졌다. 

독일의 금리인상이 유럽통화제도(EMS) 위기를 심화시키면서 대외여건마저 악화되었다(<그림 5> 참조). 유럽 각국의 통화가 사실상 서로 페그(peg)되어 있는 상태에서 독일의 금리인상은 주변국에게도 금리인상 압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당시 경기침체에 빠져있던 영국, 이탈리아 등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특히 파운드에 대한 투기적 매도가 증가하면서 유럽통화제도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르크화는 주변 통화 대비 10% 이상 절상되었고, 글로벌 경기 부진으로 이미 어려움을 겪던 수출기업들은 통화가치 상승으로 인한 수출 경쟁력 약화라는 이중고를 겪게 되었다. 내수와 수출의 동반 부진을 겪은 서독 지역은 1993년 성장률이 -2%까지 하락했고, 수입물가 하락으로 1993년 물가상승률은 -0.75%로 떨어지며 디플레이션에 빠졌다. 

(3) 혼란 후 부진 (1994~1996) : 경기 악화 가운데 동서독 격차는 축소 

1990년대 중반의 독일은 대내외 악재를 정책 대응으로 버텨내는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서독이 차례로 경기침체를 겪고 난 뒤 수 년간 독일 경제는 지지부진했다. 1994년 들어 마르크의 절상세가 꺾이며 수출을 중심으로 경기가 반등하는 듯 했으나, 이후 중남미 위기 및 일본 경제 불안 등으로 안전자산 수요가 높아지며 마르크화는 다시 절상되었다. 수출경기 악화는 투자부진과 실업률 상승으로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무역수지가 불황형 흑자를 보이며 마르크 절상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기도 했다. 

경기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재정팽창 및 통화완화 패키지를 시행했다. 정부지출 규모는 통일 당시 GDP의 17.4% 에서 1996년 19.8% 수준으로, 주정부 및 기타 공적 지출을 포함한 전체 공공재정규모는 GDP의 43.6%에서 49.3%로 늘었다. 같은 기간 동안 연방정부의 부채규모도 GDP의 42%에서 약 60%로 증가했다(<그림 6> 참조). 정책금리도 대폭 인하했다. 중앙은행의 재할인율 금리는 1993년 말 5.75%에서 1996년 말 2.5%까지 낮아졌다. 1980년대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정책대응으로 더 심한 하강은 막을 수 있었지만 경기반등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완화정책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성장률은 1994년 11.9%에서 1996년 2.9%로, 같은 기간 서독은 1.5%에서 0.5%로 하락했다. 디플레 탈출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1994년 -1.5%까지 악화됐던 물가상승률을 1996년 -0.3%로 끌어올리는 정도에 만족해야 했다. 다만 열악한 상황 하에서도 동독 지역의 노동경쟁력이 개선된 점은 긍정적이었다. 1995년을 전후로 해서 가팔랐던 임금 상승세는 둔화되는 동시에, 서독 대비 생산성과 임금의 격차는 크게 줄어들었다(<그림 7> 참조). 동독에 대한 투자를 제약하는 큰 요인 중 하나가 생산성 대비 지나치게 높은 임금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상당히 의미 있는 변화였다. 

(4) 대내 구조개선, 대외 호재로 안정화 (1997~2000) 

1990년대 말 들어 독일경제는 점차 나아졌다. 저금리 등 완화적인 정책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노동생산성이 제고됐고 기업 구조개선에 따라 효율성이 증대됐다. 동독의 임금상승세가 둔화된 가운데 서독에서도 고용증대를 위한 임금인상 억제 방안이 시행되면서, 1990년대 들어 줄곧 상승해 온 단위노동비용은 1990년대 하반기 이후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는 여타 선진국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으며, 독일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그림 8> 참조). 

대외 여건도 우호적이었다.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이 낮은 수준에 머물렀고, 신경제(New Economy)로 불리는 저물가 속의 고성장이 이어졌다. 당시 두드러졌던 IT기술의 발달은 관련 산업뿐 아니라 생산 과정의 효율화를 통해 거시경제 전반에 성장 동력으로 작용했다. 또한 주가가 급등하면서 기업의 자금여건이 개선됐고, 부(wealth)의 효과를 통해 민간 소비도 증가했다. 

1990년대 중반 경기부진을 정부 당국의 노력으로 버텼다면, 1990년대 후반부의 성장동력은 민간에 있었다. 다만 회복 과정에서도 온도 차는 있었다. 서독의 투자와 소비는 뚜렷이 증가한 반면, 동독은 어느 순간부터 정체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몇 년간 크게 증가한 건설투자가 한계에 달한 것의 영향이 컸지만, 그 배경에는 여러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 결과라고 분석된다. 제도적으로는 1995년 이후 통일기금 만료, 산업구조적으로는 높은 중소기업 비중과 낮은 자본집약도, 사회적으로는 동독 주민들의 부적응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후 2000년대 들어서면서 독일은 다시 긴 경기침체에 빠지게 된다. IT버블 붕괴 및 9/11 사태가 벌어지자 대외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더욱 심한 타격을 받았다. 미국의 금리인하로 유로화가 강세 전환된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었다. 당시 독일은 2차대전 이후 최장기 경기부진에 빠지며 ‘유럽의 병자 (病者)’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얻게 된다. 통일의 후유증에 대외 요인의 악화가 더해진 결과로 보인다. 이후 독일은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등 구조개혁 조치를 단행하면서 점차 다시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2. 독일 통일과의 차이점 
  

남북 경제력 격차 독일보다 훨씬 커… 북한의 자본주의 체제 적응도 문제 

독일 통일은 체제전환과 경제통합을 모두 이뤄낸 드문 케이스라는 점에서, 향후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우리에게 소중한 선례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해도 독일의 경험이 우리에게 얼마나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히 남는다. 분단의 배경이 다르고, 인구 비율과 같은 경제의 기초여건 등 여러 면에서 다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여건 측면에서 현재 남북한과 당시 동서독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표 2> 참조). 독일의 경우 동독 인구가 서독의 1/4 수준이었지만 북한은 남한 인구의 절반에 달한다. 반면 경제규모 격차는 더욱 크다. 동독이 서독 GDP의 1/10이었던 것에 비해 북한은 남한의 1/40에 불과하다. 1인당 GDP는 동서독이 2.6배였던 것에 비해 우리는 21배에 달하고 있다. 동서독에 비해 남한 대비 북한의 인구비율이 2배(=3.8/2.0)에 가깝지만 1인당 소득 비율은 1/8(=2.6/20.8)에 불과하다. 만약 독일과 비슷한 수준의 경제적 수렴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서 소요되는 비용은 훨씬 더 커질 우려가 있다. 

경제규모 차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시장경제에 대한 적응력일 것이다. 2000년대 들어 북한에서도 생산 현장에서 인센티브제가 시행되고, 주민들의 장마당 거래가 늘어나는 등 부분적인 시장경제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경제 체제를 채택한 기간만을 비교해도 독일은 분단 45년 후에 통일됐지만 우리의 경우 당장 통일한다 해도 분단 70년만의 통일이다. 독일의 경우, 통일 이전부터 방송, 통신교류가 가능했고 부분적으로 인적인 왕래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이 되자 동독 주민들이 스스로를 ‘2등 국민’이라고 비하하는 등 동독 주민들의 부적응 문제가 심각했다. 통일 이후 세대에 이르러서야 시장 경제체제에 대한 적응이 본격화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남북한은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남북한간의 순수 민간교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렇다고 북한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 간의 교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오랫동안 고립돼 온 북한이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점진적인 경제통합을 전제 

경제여건의 차이는 결국 통일 방식의 차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통일 전후 여러 사회 및 경제정책도 독일 경제통합의 예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 형편에 맞는 것이 채택될 것으로 보인다. 본 글에서 독일의 예를 주로 참고하면서 여타 체제전환국의 경험을 보완하는 이유다. 

우리의 통일이 독일과 가장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낼 부분은 경제통합의 방법일 것이다. 남북한의 통일방식과 관련해서는 학자들간에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급변사태 등에 따른 즉각적 통일과 남북연합 등 합의에 의한 점진적 통일이 모두 가능성 있는 것으로 논의된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는 독일과 달리 점진적인 통합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거의 일치된 견해다. 통일의 충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점진적 경제통합이 필수적이며, 설혹 정치적으로는 통일이 급격히 이루어진다고 해도 경제적 통일, 즉 경제통합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의 과정과 방식에 관한 자세한 서술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 글에서는 급격한 경제통합이 야기하는 불확실성과 가변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점진적 경제통합 혹은 남북한 경제의 한시적 분리를 전제로 논의를 이어가기로 한다. 

북한경제 재건 과정에서 국제변수가 중요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동독의 재건은 거의 전적으로 서독의 몫이었지만,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상 북한재건의 권리와 의무를 남한이 전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는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지고 북한의 개혁과 개방이 본격화될 때 미국, 중국, 일본 등 각국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북한지원 프로그램이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큰 책임과 권한은 우리 정부가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노동시장 및 사회보장제도의 통합은 유보 

점진적인 경제통합의 핵심은 노동시장의 분리다. 남북한간 급격한 대규모 인구이동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독일의 경우에도 경제적 충격이 클 것으로 예상돼 학자들 간에 속도 조절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됐었다. 하지만 동서독 간 교류가 꽤 활발했던 데다, 통일이 되기도 전에 이미 많은 수의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이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구 이동을 제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전면적인 경제통합을 선택했고, 동독에서의 인구 유출이 이어지면서 동독 경제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1:1 화폐교환, 고임금 정책 등의 정책이 점차 효과를 발휘하면서 동독 인구 이탈은 잠잠해졌지만, 이 과정에서 서독의 경제적 부담은 크게 확대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만일 우리도 독일 식의 전면적이고 급격한 경제통합을 선택한다면, 수많은 북한주민이 남한으로 이주하면서 겉잡을 수 없는 사회적·경제적 혼란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연구에 따르면 한반도가 독일 식으로 통일될 경우 북한 주민의 7%에 해당하는 180만명이 남한 지역으로 이주할 것으로 분석됐다. 이를 막기 위해 점진적으로 경제통합을 이루면서도 남북한 경제의 경계를 유지하는 이른바 준통합경제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 (KDI)은 북한의 1인당 소득이 남한의 30%에 근접하도록 10년의 한시적 분리방안을 제시했으며 한국은행은 특구식 경제통합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경우 사회보장제도 통합에서 오는 부작용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독일의 경우 동독 시민에게 서독시민과 동등한 수준의 사회보장혜택을 주는 과정에서 통일비용이 크게 증가한 바 있다. 한시적 분리를 통한 점진적 통합 방안의 경우, 북한인구의 이탈을 막기 위해 사회보장 수준을 과도하게 높이는 고육책을 선택할 필요가 크게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완만한 사유화와 통화통합 

민영화나 토지소유권 처리와 같은 시장경제제도 정책을 위한 기본적인 정책도 독일에 비해 완만하게 실시할 필요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시장원칙을 고수한 급진적인 민영화와 토지소유권 처리를 위한 정책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구동독기업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민영화가 현금매각 방식으로 진행돼 경제력이 부족한 동독주민들의 참여가 저조할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민영화가 수많은 기업을 폐쇄하고 실업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국 민영화 수입은 당초 예상의 1/16에 불과해 서독 정부에 막대한 손실을 안겼다. 1949년 이후 수용된 토지는 원소유자에게 반환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한 토지소유권 처리도 소유권의 불확실성을 키워 시장기능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민영화 과정에 국가가 개입해 적응기간을 두어 경쟁력을 키운 후 민영화하는 등 독일과 달리 북한 주민들이 많이 인수할 수 있는 방안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토지사유화 문제에 있어서도 형식논리에서 벗어나 효율적인 사유화 방안이 추진될 것이며 반환보다는 보상 위주의 처리도 예상되고 있다. 

거시경제의 안정을 위한 제도의 정비와 운영 면에서도 차이가 날 가능성이 크다. 앞서 보았듯이 독일에서 1:1 화폐통합을 단행한 것은 정치적 의도가 크게 작용했던 것이었다. 당시 물가를 고려한 적정환율은 4.4:1 정도였지만, 동독인들에게 서독인과 비슷한 삶의 질을 약속함으로써 통일열망을 가속화하고 인구이동 압력을 완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통일 초 거품경제 및 이후의 산업경쟁력 저하 등 광범위한 폐해를 낳았다. 이와는 달리 한반도에서 화폐통합은 남북한경제의 한시적 분리 기간 이후 점진적으로 남북한의 경쟁력 격차와 거시변수의 수렴 여부 등을 고려해 양측 화폐의 실질가치를 반영하는 선에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독일과는 달리 상당 기간 북한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도록 하는 화폐제도가 필요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3. 남북한 통일 시 예상되는 주요 경제이슈 
  

독일의 사례를 통해, 앞으로 통일이 현실화 될 경우 우리에게 나타날 현상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독일과의 여건 차이가 빚어낼 상황은 어떠할지를 가늠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는 2장에서의 논의와 같이 정치적으로 급격하게 통일이 추진되었더라도 경제적으로는 한시적 분리를 통해 점진적 통합을 도모하는 것을 상정한다. 따라서 통일 한국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남북한간 노동시장 및 화폐는 당분간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가정하고 있다. 경제통합 과정에서 북한지역의 통계가 어디까지 편입되는지에 따라 경제지표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통계적인 수치보다는 실제 우리에게 발생할 경제적 압력에 초점을 두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① 초기 금융시장 불안… 사전 재정여력 확보가 혼란을 막는 열쇠 

통일의 과정에는 적지 않은 불확실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장기적으로는 경제 발전이 기대된다고 하더라도 초기 단계에서는 불안감이 확대될 수 있다. 투자자들이 통일에 따른 경제적 시너지 효과에 더 무게를 두는지, 아니면 그 과정에서의 불확실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금융시장의 양상은 달라지게 될 것이다. 

독일의 경우 통일 이후 약 8개월간 마르크화는 절하 압력을 받았다. 주가도 두 달에 걸쳐 약 4% 가량 소폭 하락했다. 통일의 충격으로 자금 유출이 발생한 결과로 해석되기 쉽다. 그러나 여기에는 통일 이외에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둘러싼 대외불안의 영향이 더해져 있다. 통일에 대한 기대가 조정된 측면도 있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통일에 대한 금융시장의 반응은 비교적 담담한 편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수 있다. 

먼저, 통일 1년 전인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독일 주가와 마르크화 가치가 올랐다. 1989년 11월 이후 1990년 7월까지 주가는 약 30%, 마르크화 가치는 달러 대비 약 8.7% 가량 크게 상승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가 사실상 통일의 신호탄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금융시장에서는 통일에 대한 긍정적 기대가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1990년 7월부터 독일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했지만, 이는 당시 쿠웨이트 전쟁에 따른 국제유가 급등이 주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통합이 완료된 1990년 11월 이후 마르크화는 절하 압력을 받았다. 일단 1989년부터 이어져 오던 강세 흐름이 멈췄으며, 1991년 초부터는 약세로 반전되었다. 1991년 2월부터 7월까지 마르크화 가치는 달러 대비 17% 하락했다. 이 역시 직접적으로는 대외요인의 영향이 컸다. 걸프전 종전 이후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글로벌 주요 통화가 달러 대비 동반 약세를 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화의 절하 폭은 8%에 그쳐 달러 강세로 마르크의 급락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여기에는 통일 후 경상수지가 적자로 반전된 것과 함께 통일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어느 정도 조정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역시 통일 직후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금융시장이 혼란을 보일 수 있다. 통일비용의 부담이 부각되며 채권을 중심으로 외국인 자금이 유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에서 보듯 그 정도는 심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경제력 격차의 부담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통일경제가 가져올 시너지 효과에 대한 기대도 높은 상황이다. 대북리스크가 구조적으로 축소되면서 원화자산에 대한 신뢰가  제고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기 측면에서도 점진적이고 신중한 통합을 통해 초기 충격을 최소화할 것이라는 점, 북한 경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남한지역의 생산도 증가할 것으로 기대되는 점이 금융시장의 불안감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관건은 재정건전성이다. 최근 양호한 재정건전성이 대표적인 국내 투자의 유인으로 꼽히고 있다는 점에서 재정악화가 미칠 영향은 더 커질 수 있다. 특히 재정건전성 저하로 국가신용등급이 영향을 받을 경우 외국인 투자자금이 대거 유출되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독일의 경우 통일 전 재정건전성이 워낙 양호했기 때문에 통일로 인한 재정악화에도 불구하고 최고 국가신용등급을 유지한 바 있다. 재정악화를 최소화하는 자금조달 방안을 강구하는 한편 통일 이후의 재정악화에도 위험수위를 넘지 않도록 사전에 체력을 키우는 것이 통일 초기의 금융시장 혼란을 막는 방안이 될 것이다. 

② 재정악화 불가피… 소비성 이전지출 축소 및 민자유치로 부담 덜어야 

통일비용은 대체로 경제통합 과정에서 양 지역간 경제력 격차를 일정 수준 이하로 줄이는데 드는 비용을 의미한다. 공공부문의 이전지출을 기준으로 할 경우, 1991년부터 1999년까지 동독의 1인당 GDP가 서독의 33%에서 63%로 증가하는 동안 통일비용은 약 1조 6천억 마르크가 지출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연간 서독 GDP의 약 6%가 동독에 이전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민간부문까지 합하면 서독 GDP의 약 7~8%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10> 참조). 

이렇게 대규모 자금이 지출된 것에는 소비성 사회보장지출의 영향이 컸다. 총 이전지출 가운데 사회간접자본 투자는 12% 수준이었던 반면 사회보장은 전체의 51%를 차지했다.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주를 막고 서독 주민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줄이는 과정에서 각종 보험 및 실업급여 등 사회보장 관련 지출이 크게 늘어났다. 투자는 생산기반이 구축될수록 점차 추가 투입 비용이 줄어들지만, 소비성 사회보장 지출은 그렇지 않아 부담이 더 길게 이어졌다. 

자금조달은 연방정부 및 주정부가 전체 금액의 약 70%를 담당했다. 연방정부의 재정수지는 1989년 거의 균형에 가까운 흑자였던 것이 1990년 통일 이후 10년간 GDP의 약 3% 적자로 악화되었다. 부채를 통한 자금조달이 늘면서 연방정부의 이자부담 규모도 GDP의 1.5% 수준에서 약 2.4%로 증가하였다. 연간 정부지출의 10%가 넘는 금액이었다. 

남북한의 통일비용에 대해서도 다양한 연구가 진행돼 왔으며, 연구에 따라 통일비용의 규모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표 4> 참조). 최근 금융위원회에서 발표한 통일비용 및 재원조달 방안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1,250달러 수준인 북한의 1인당 GDP를 20년 뒤 10,000달러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데 총 5,000억 달러, 약 550조원 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경우 재정에 큰 부담 없이 비용조달이 가능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실제 통일비용은 이보다는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올해부터 20년간 우리나라의 명목성장률(실질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의 합산)을 평균 3%로 낮춰 잡더라도 20년 뒤 1인당 GDP는 대략 50,000달러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경우 위에서 상정한 북한의 1인당 소득은 남한의 20%에 수준에 불과하다. 한 국가의 지역간 격차라고 보기에는 큰 차이이며, 결국 소득격차 축소를 위해 추가 비용이 투입될 가능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 주민의 체제 부적응, 정치 불안 심화, 부정확한 통계 등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경제통합이 지연되며 비용이 증가할 가능성도 있다. 

점진적 통합을 통해 통일비용 부담을 최소화한다는 방안이지만, 경제력 격차가 워낙 큰데다 통합의 과정에서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 우리의 통일비용이 독일보다 적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통일비용 증가는 결국 국채 발행이나 예산 지출 확대로 이어질 것이다. 독일재건은행(KfW)처럼 정책금융기관이 자본조달을 담당한다고 하더라도 자본확충을 위한 정부 출자 확대 과정에서 재정이 악화될 것이다. 국공채 발행 증가에 따른 금리 상승도 재정부담을 확대시키는 요인이다. 

반면 독일에 비해 나은 측면도 있다. 우선 소비성 이전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의 지출이 컸던 것에는 결국 급진적 경제통합의 영향이 컸다. 노동력 이동을 제한한 상태에서 북한의 자립을 도모할 경우 북한 주민의 구매력을 높이기 위한 지출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민간투자가 활발할 것으로 보이는 점도 긍정적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급한 경제통합의 부작용이 최소화될 경우 북한의 풍부한 저임금 노동력이 투자유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국제기구의 지원도 기대해볼 수 있다. 1990년대에는 동시다발적으로 지원을 필요로 하는 국가가 많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나은 편이다. 북한이 체제전환에 돌입한다면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등을 통한 자금지원을 모색해볼 수 있다. 큰 규모는 아니더라도 저금리로 장기간 자금을 조달할 수 있고 외화자금 사정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재정부담을 덜 수 있다. 이런 긍정적 요인을 충분히 활용해야 독일에 비해 통일비용의 충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③ 대북투자 붐 일어난다 

남북한 경제통합의 과정에서 가장 활발할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대북투자 부문이다. 우리 경제가 만성적인 투자 부진 상황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독일에 비해 훨씬 우호적인 여건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동독의 경우, 이주로 인한 생산가능 인구 감소 자체가 악조건이었다. 이후 인구 유출은 다소 안정되었지만, 인구 유출을 막는 과정에서 임금이 크게 오르면서 경쟁력이 저하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된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 비하면 생산성 대비 임금 수준이 지나치게 높았다. 당시 동독의 임금은 체코의 열 배에 달했다. 

높은 사회보장 수준이 동독 주민들의 근로의욕을 낮추고 자본주의에 대한 적응을 방해하기도 했다. 체제 부적응 문제까지 동독의 경쟁력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대동독 투자는 주로 공공부문을 통한 인프라 투자 위주로 이뤄졌다(<그림 11> 참조). 1991년부터 1998년까지 동독에 대한 총투자 중 61%가 건설, 부동산, 교통, 통신 등 인프라 투자였다. 민간투자는 전체 투자의 58%였지만, 정부의 민간투자 지원규모가 총 투자의 17%에 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민간부문의 설비투자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에 비하면 북한의 여건은 우호적이다. 우선 기본적으로 북한의 임금수준이 낮은데다, 점진적으로 통합할 경우 통일 이후에도 인구 유출 및 과도한 임금 상승을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될 경쟁국가가 없어 투자가 분산될 우려도 적다. 풍부한 지하자원, 중국 및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통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도 동독이 갖지 못했던 장점이다. 중국 및 동남아 등지에 진출한 기업들이 북한으로 생산기지를 전환할 유인이 있으며, 특히 중소기업들에게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향후 북한은 제조업 생산 (및 관광산업) 중심으로, 남한은 서비스 산업 및 고부가 R&D 중심으로 분업구조를 형성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통일 직후부터 민간투자가 크게 증가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초기의 불확실성이 걷히고 기본적인 투자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통일 직후에는 정부 주도의 도로 및 철도, 통신 및 금융시스템 등에 대한 투자가 주를 이루다가, 인프라 구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면 비용절감을 위한 노동집약형 제조업이나 중장기 수익성이 기대되는 대북 민자사업 등을 중심으로 민간기업의 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북한 주민들의 체제 적응을 함께 도모하는 차원에서, 독일과 같이 남북한간 도시, 기업, 학교 간 결연을 통해 체제 전환과 재건을 돕는 모습도 나타날 수 있다. 

활발한 대북투자는 북한 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짐으로써 실업급여 등 사회보장 지출의 부담을 줄이는 한편 북한 내 세수 증대를 통해 재원 마련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은 투자가 예상만큼 활발하지 못해 통일의 부담이 증가했다면, 남북한의 경우 오히려 투자가 경제수렴의 과정을 효과적으로 단축시키는 구심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④ 경상수지 악화 압력 가중… 적자 반전 가능성도 있어 

독일은 통일이 되자마자 경상수지가 적자로 반전되었다. 플라자 합의로 마르크화가 급등할 때에도 경상수지는 흑자를 유지했지만 통일의 영향은 피해가기 어려운 것이었다. 우선 상품수지 흑자가 크게 줄었다. 동독 지역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면서 원자재 및 자본재 수입이 증가했다. 동독 주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해외로 나가던 서독 제품들이 동독으로 유입된 것도 경상수지 적자 압력으로 작용했다. 대동독 교역을 포함시킬 경우 통일 후에도 서독의 경상수지가 흑자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그림 12> 참조). 

소득수지와 서비스수지도 악화되었다. 소득수지 악화는 기존 해외직접투자가 통일 이후 동독으로 유입된 것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서비스 수지 악화는 통일의 충격보다도 마르크화 강세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1990년대 EMS 위기까지 약 10년에 걸쳐 마르크화가 강세 일변도를 보이면서 서비스 수지도 같은 기간 동안 악화를 이어갔다. 

우리 역시 큰 흐름은 독일과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 북한 투자가 확대되고 남한 내 관련 산업의 생산과 투자가 증가하면서 원자재 및 자본재 수입이 늘어날 것이다. 남한의 기존 수출 물량이 북한으로 공급되면서 수출이 감소하는 현상도 나타날 것이다. 당시 동독만큼 북한 주민의 구매력이 높지는 않겠지만, 북한의 인구부담이 훨씬 큰데다 생산기반은 취약한 상태다. 특히 통일 직후 당분간은 주로 남한의 생산으로 북한 수요를 충당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당시 독일 경상수지는 통일 전 GDP 대비 약 5% 흑자에서 통일 이후 1991년 1.3% 적자로 반전되었다. GDP의 6%가 넘는 경상수지 적자 압력이 발생했던 셈이다. 지난 3년간 우리의 경상수지가 GDP 대비 약 5~6%의 흑자를 보이고 있다. 통일 독일 경상수지 적자 전환의 주된 요인이 대동독 투자 증가였고 우리의 대북한 투자가 더욱 활발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통일 이후 우리의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도 적자로 반전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대외 요인에 따른 원화가치 급등 가능성이 낮다는 점은 독일에 비해 경상수지 적자 압력을 줄이는 요인이다. 당시 독일은 경상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대외요인에 따른 마르크화 강세가 심화된 바 있다. 이는 당시 제도적인 요인에 따른 예외적인 경우였으며, 원화를 둘러싸고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경상수지 개선은 독일보다 빠를 듯… 원화도 초기 약세 후 강세 전환 전망 

독일은 1990년 경상수지가 적자로 반전된 이후 10년간 적자 흐름이 이어졌다. 2000년대 들어 유로화가 출범하고 나서야, 상대적으로 낮은 통화가치 및 유로존 역내 수출이 증가 등에 힘입어 경상수지가 흑자로 전환될 수 있었다. 

독일에게 있어서 유로화 체제와 같은 호재를 우리가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동독에 비해 북한 경제의 자립이 더 빠르게 진행되는 것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독에 비해 대북 투자는 더욱 활발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외 호재에 기대지 않아도 독일에 비해 흑자 전환이 더 빠르게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이 과정에서 원화 가치도 시기별로 상반된 압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 초기에는 경상수지 적자에 따른 원화 약세 압력이 커질 것이다. 이는 통일 후 우리 경제가 받을 충격을 완화해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내 생산기반이 구축되고 나면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이 점차 늘면서 경상수지가 개선되고 원화가치도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 중장기적으로는 고령화 부담 경감 및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등 원화 자산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며 원화는 강세를 보일 전망이다. 그 때에는 내수와 수출의 균형을 통해, 원화 강세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과거와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해 볼 수 있다. 

⑤ 북한 물가 오르겠지만 큰 불안은 막을 수 있을 것 

과거 체제전환기 국가들은 대체로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다. 결핍 경제(shortage economy)하에서의 화폐과잉축적(monetary overhang), 가격 자유화, 재정 및 통화규율 부족, 통화가치 절하로 인한 수입 물가 상승 등이 그 원인이었다. 체제전환 초기 5년간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20%대를 기록한 체코와 헝가리가 그나마 가장 안정적인 축이었으며, 폴란드와 발트3국은 연평균 2~300%, 우크라이나 등 구소련 국가들 중에는 1,000%를 크게 넘어서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비하면 동독은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동독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991년에 약 13%까지 오른 것이 가장 높은 수치였다. 이와 같이 상대적으로 물가가 안정적일 수 있었던 것은 서독에서 동독으로 물품을 공급함으로써 통일 이후 동독에서는 결핍경제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과, 서독과의 즉각적인 화폐통합으로 과잉유동성 및 통화가치 절하 문제가 크게 줄었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었다. 물가상승은 대체로 가격 자유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북한은 동독과 여타 체제전환국들의 사이에 있을 것이다. 우선 처음부터 화폐통합을 시행했던 동독보다는 물가 상승세가 가파를 가능성이 높다. 남한과 화폐 통합이 되기 전까지, 체제전환 및 경제적 자립 과정에서 북한도 다른 체제전환국과 같은 물가 상승 압력에 직면할 것이다. 동독은 사실상 물가 불안 문제가 거의 없었지만, 북한은 물가 상승으로 거시 안정성이 흔들리며 불안감이 높아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체제전환국과 북한이 다른 점은 남한의 도움에 힘입어 점진적인 전환을 시도할 것이라는 점이다. 남한의 공급을 통해 결핍경제 현상을 줄이는 동시에, 금융인프라 구축을 통해 물가 상승에 대한 탄력적 대응 수단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가 재정 및 통화규율 등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적으로 이식하는 동시에, 북한의 거시건전성을 면밀히 모니터함으로써 통화가치에 대한 신뢰가 급락할 위험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체제전환 과정에서 북한의 물가 상승은 불가피하겠지만, 북한의 경제적 자립과 남북간 경제통합이 어려움을 겪을 정도에 이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4. 시사점 
  

“남북한 통합이 시작된다면 내 전 재산을 북한에 투자하고 싶다.”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사장의 말이다. 골드만삭스는 ‘통일 한국은 세계7위의 경제대국이자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건설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중장기적으로 남북한 경제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높은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는 데에는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관건은 장기적 비전에 이르는 과정이다. 통일의 충격과 그 이후의 진통을 어떻게 극복해내느냐에 따라 바람직한 통일 한국의 상(像)에 도달하는 시간과 비용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 후 독일이 어려움을 겪은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동서독간 경제력 격차였다는 점에서, 남북한이 통일 후 겪게 될 진통은 더욱 심할 가능성이 있다. 막대한 통일비용을 부담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경기 하강 압력이 커질 우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점진적 경제통합, 혹은 남북한 경제의 한시적 분리가 더욱 의미를 가진다. 점진적 통합이 큰 탈없이 진행된다면 통일 이후의 극심한 혼란을 방지함으로써 통일비용을 감축하는 한편 민간부문의 선순환 구조가 갖춰지는 시기도 더 앞당길 수 있다. 통일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은 통일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이어가는 데에도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아울러 점진적이고 현실적인 화폐통합과 사회보장제도 도입을 통해 우리측의 부담급증을 막아야 한다. 이와 동시에 북한측의 임금급등을 막고 경쟁력을 유지해서 북한지역의 자생적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통합 초기에는 특히 북한지역의 물가급등 가능성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이다. 물가급등과 이로 인한 주민생활의 피폐화는 자칫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이지만 정치적으로 가능한 결정을 불러와 점진적인 통합과정에 차질을 빚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90년을 전후해 세계경제에 편입된 체제전환국들은 통상적으로 인플레이션과 실업, 금융경색 등의 심한 부작용을 겪었다. 동독의 경우에는 서독경제가 사실상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함으로써 커다란 충격 없이 통합과정을 겪으면서 시장경제로 이행할 수 있었다. 남한의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북한이 체제 이행의 부작용을 가능한 한 작게 겪도록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는 어지간한 충격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경제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독일이 통일 충격을 그나마 극복한 것은 그만큼 독일경제의 체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통일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들 것에 대비해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울러 북한 경제의 순조로운 체제전환에 요구되는 재원을 다양화하기 위한 사전 정지(整地)작업도 요구된다. 정치경제적으로 부담이 큰 증세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특히 외자의 역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북한이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민간의 상업적 투자도 더욱 활발히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파급효과가 결국 남한의 재정부담을 덜어준다는 점에서 통일 준비 단계에서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을 모색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건전한 경상수지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1,000억달러에 가까운 경상흑자를 내는 요즘 같으면 경제통합 과정에서 투자수요 등으로 경상흑자가 줄어들어 원화의 절상압력이 완화되는 효과를 볼 수도 있겠지만 경상흑자가 크게 줄어들어 균형 수준이거나 혹은 적자 상황이라면 경제통합은 경상수지를 크게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초 독일은 통일 이후 4~5년이면 동서독간의 경제통합이 무난히 이루어질 것으로 낙관했었다. 서독의 경제규모에 비해 동독경제의 규모가 작았던 데다가 생산성 등의 측면에서 동독 경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동독기업들의 매각대금으로 통일 비용을 일부 충당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과적으로 손실이 발생했다. 낙관은 금물이지만 지나친 비관도 금물이다. 독일의 교훈을 바탕으로 우리 실정에 맞는 정책을 채택해 나간다면 완전한 통합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부작용을 줄여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하나하나 준비해 나가는 자세가 요구되고 있다. 개성공단 사업을 유지, 확대해 나가면서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는 등 상호간의 경제협력을 늘려나가는 것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시범적인 교류 이외에 천안함 사태 등으로 위축돼 있는 교역과 투자를 확대해 나가는 일도 중요하다. 교역과 투자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동시에 북한에게 시장경제 경험을 제공해 통합의 충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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