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우리나라 장기침체 리스크 커지고 있다'
장기침체는 한 국가의 성장활력이 크게 떨어지고 저성장이 오랜 기간 지속되는 상황을 뜻한다. UN통계를 이용해 분석해보면 전세계 211개국가중 절반 이상이 장기침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난다. 오일쇼크나 외환위기 등 경제충격으로 촉발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중위소득 국가들에게 더 자주 발생한다. 생산요소 측면에서는 노동이나 자본투입보다는 생산성 하락이 장기침체를 가져온 주된 요인이다. 침체가 시작되는 기간에 대부분 국가에서 재정적자 비중이 높게 나타났으며 물가, 고용 불안도 확대되었다.
장기침체를 겪으면서 국가의 위상이 한 단계 낮아진 남유럽이나 중남미 국가들은 포퓰리즘에 따른 단기정책이 장기적 성장기반을 약화시키고 경직된 노동시장이 산업경쟁력을 떨어뜨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보호주의 강화와 재정확대 등 무리한 부양을 통해 성장을 유지하려다가 기업경쟁력 저하, 재정기능 약화에 따른 인프라 부족 등의 후유증으로 현재까지 고전하고 있다. 이탈리아와 같이 세계 산업구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제조업 경쟁력이 떨어진 사례도 있다. 일본의 장기침체는 고령화 등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엔고와 디플레, 국가부채확대를 막지 못한 점은 정책적 책임이 크다.
최근 우리경제의 흐름을 보면 장기침체를 겪었던 국가들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세계경제의 활력이 저하되고 산업 및 경쟁구조도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수출의 성장견인력이 크게 약화된 가운데 수요위축의 악순환 등 위기 후 증후군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국내경제 성장세 저하는 생산성 증가율 하락에 따른 영향이 가장 크게 나타났는데 특히 제조업과 건설업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다. 자본투입도 둔화되는 가운데 노동투입이 늘면서 성장을 지지하고 있지만 이는 지속되기 힘들다. 자본투입 둔화가 이어지고 생산성 저하추세가 개선되지 못할 경우 향후 5년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은 2% 중반, 2020년대에는 1%대로 낮아질 수 있다.
과거 침체를 겪었던 국가의 경험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경제의 비효율성을 최대한 제거하기 위해 노동시장 및 공공부문 구조개혁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재정확대나 부동산 부양 등을 통해 무리하게 과거의 성장세를 되찾으려는 포퓰리즘을 경계하고 재정 및 연금안정성을 높여야 한다. 내수서비스 부문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노력을 강화하고 수출과 내수의 균형성장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 목 차 >
1. 장기침체기의 경제지표 변화
2. 주요국 장기침체 사례
3. 우리나라의 장기침체 가능성
4. 정책방향
우리 경제의 부진이 길어지고 있다. 2011년 이후 국내경제의 평균 성장률은 3.0%에 머물러 2000년대 위기 이전의 4.6%를 크게 하회했다. 더욱이 지난해 3.3%에 머문 성장률이 올해에는 더 낮아질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경제상황이 이어지면서 경기부진이 장기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크다.
최근 미국이나 유로존 등 주요 선진국들에서도 장기침체 가능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커지고 있다. 중국이나 브라질, 러시아 등 거대개도국들도 경제활력이 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뿐 아니라 내부적인 한계도 많아 그만큼 저성장 리스크가 큰 상황이다. 특히 90년대 일본과 유사한 경제여건들이 많아 ‘잃어버린 20년’ 경로를 따라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 일본뿐 아니라 그동안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장기적인 성장활력 저하를 겪은 바 있다. 주요 국가들의 장기침체 시기에 나타났던 특징들을 찾아보고 이를 통해 향후 우리나라의 장기침체 리스크를 진단해본다.
1. 장기침체기의 경제지표 변화
장기침체는 한 국가나 지역의 성장활력이 크게 떨어진 이후 저성장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으로 정의해볼 수 있다. 성장률이 얼마나 떨어지고 언제까지 저성장이 지속되어야 장기침체로 볼 것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본 분석에서는 7년 평균 성장률이 3% 이상을 유지하던 국가가 이후 7년 동안 성장률이 절반 이하, 동시에 2% 아래로 떨어진 사례를 장기침체로 정의해보았다.
UN 국민계정 통계를 이용해 1970년 이후 211개국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아직 진행중인 현상이어서 분석기간에서 제외하였으며 이에 따라 2002년 이전 시점에 시작된 침체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분석 결과 절반 이상인 126개 국가가 장기침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사우디아라비아, 우루과이, 폴란드 등 21개 국가는 두 차례의 장기침체를 겪었다.
선진국 중 일본이 1993년을 기점으로 성장률이 이전 7년 4.1%에서 이후 7년 0.7%로 떨어졌으며 독일 역시 1992년을 기점으로 장기침체에 접어든 바 있다. 전체 사례를 평균해보면 위기 이전 5.4%에서 이후 -0.3%로 성장률이 낮아졌다(<표 1> 참조).
경제위기가 장기침체 촉발
장기침체 사례는 경제위기 기간에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1, 2차 오일쇼크가 시작된 1970년대 후반부터 성장세가 뚜렷이 꺾인 국가들이 65개국에 달해 전체 사례의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그림 1> 참조). 이는 2차대전 이후 세계경제가 고성장했던 데 따른 상대적인 효과가 크다. 전쟁기간 동안 미루었던 소비와 투자가 진행되고 그동안의 기술발전이 생산에 집중적으로 반영되면서 유가충격 이전까지 세계경제는 유례없는 호황을 경험한 바 있다. 이러한 반등효과가 사라지는 시점이 오일쇼크와 겹치면서 상당수 국가들의 성장세가 한 단계 하락했다. 선진국들은 1차 오일쇼크 이후, 개도국들은 2차 오일쇼크의 충격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산유국들은 유가하락에 따른 수출급락이 성장하락의 주된 원인이었으며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 등 선진국의 투자자금 회수로 외채위기에 빠지면서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80년대 후반 북유럽 금융위기 이후 핀란드가 장기침체에 빠졌으며 1990년대 초반에는 부동산 버블붕괴를 겪은 일본과 통독 후유증에 시달렸던 독일의 성장세가 크게 떨어졌다. 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로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장기침체 상황에 접어들었다. 2008년 이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분석기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성장률 흐름을 감안할 때 2차 오일쇼크보다 더 많은 국가들이 이후 장기침체 사례에 포함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중진국 함정
장기침체기의 1인당 소득 수준을 보면 중위권 국가들의 사례가 좀 더 많다. 1인당소득 순위가 30~70% 범위에 포함되는 국가들이 전체 사례의 절반을 차지한다(<그림 2> 참조). 특히 장기침체를 경험한 국가들 중에는 과거 높은 성장을 통해 선진국에 진입할 것이라는 기대를 주었으나 실패한 국가들이 포함된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높은 성장세를 보이면서 곧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던 중남미 국가들 중 상당수가 장기침체를 겪으면서 더 이상 소득이 늘지 못하고 중위권 국가에 머물렀다. IMF 분석에 따르면 1인당소득 2,000달러에서 15,000달러(2005년 PPP달러 기준)에 이르는 중위소득 국가들은 저소득 국가에 비해 40% 이상, 고소득 국가에 비해서는 60% 이상 성장저하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 IMF는 정부의 간섭이나 무역 폐쇄성, 인프라 부족 등이 중진국 함정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라는 분석을 제시한 바 있다.
수출, 투자의 급격한 위축
장기침체 기간 중 수요 변화가 가장 큰 부문은 투자였다. 대부분의 국가가 장기침체 기간 중 마이너스 투자증가율을 기록했다. 126개국의 평균 투자증가율은 이전 7년 6.5%에서 이후 7년에는 -2.5%로 하락했다(<그림 3> 참조). 특히 오일쇼크 침체기 중 산유국 및 중남미 국가들의 투자가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으며 일본, 네덜란드, 그리스 등 선진국도 평균 투자증가율이 제로 수준에 머물렀다.
수출부문의 위축도 뚜렷했다. 국민계정상 물량기준 수출증가율은 침체 이전기간 평균 6.1%에서 이후 0.8%로 둔화되었다. 경제위기에 따른 세계수요 둔화가 수출증가세를 떨어뜨리면서 성장저하의 주된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소비는 상대적으로 둔화폭이 완만하게 나타났다.
산업별로 보면 건설업의 변화가 가장 컸다. 건설업은 침체 이전에는 가장 빠르게 성장했지만 침체기간에는 가장 큰 폭으로 위축되었다. 침체국가들의 평균 건설업 성장률은 7.0%에서 -2.7%로 낮아졌다(<그림 4> 참조). 독일, 일본, 그리스, 핀란드 등 선진국들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자산가격 상승 등에 의한 건설호황이 고용창출이나 내구재 소비 증가를 통해 높은 경제성장을 이끄는 경향이 있지만 건설붐이 종료된 이후에는 위축되는 폭이나 기간이 커서 경기침체의 골을 깊게 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제조업과 서비스업 성장도 평균 5%p 이상 낮아졌다.
한편 침체가 시작되는 기간에 많은 국가들이 큰 폭의 재정적자를 기록했던 것으로 나타났다(<그림 5> 참조). 평균 재정수지/GDP 비중은 -3.0%를 기록했으며 침체기간 중에는 적자비중이 다소 낮아졌다. 침체를 막기 위해 재정지출을 늘린 국가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후 적자를 줄이는 과정에서 경기위축이 더 심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침체기간 중 물가상승세는 평균적으로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중남미 등이 외환시장 불안으로 통화가치 급락에 따른 인플레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실업률은 7.3%에서 9.4%로 크게 높아졌다(<그림 6> 참조).
생산성 하락이 경기침체 이끌어
생산요소 측면에서 성장요인을 분해해보면 노동이나 자본투입보다는 생산성 하락폭이 가장 컸다. 총요소생산성은 침체 이전에는 평균 0.8%p 경제성장률을 높였지만 침체기에는 성장률을 -2.6%p 떨어뜨렸다(<그림 7> 참조). 통계가 조사된 75개 국가 중에서 73개 국가가 침체기간중 평균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들과 산유국의 생산성 감소가 가팔랐으며 일본, 핀란드, 그리스 등 선진국도 큰 폭의 생산성 감소를 경험했다.
자본투입도 성장률을 평균 1.1%p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투자의 급격한 위축으로 자본축적이 늦어지면서 잠재성장능력을 둔화시킨 것이다. 노동투입의 성장기여도는 상대적으로 완만하게 떨어졌다.
2. 주요국 장기침체 사례
장기침체를 경험한 국가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경제에 시사점을 줄만한 사례들을 살펴본다. 유럽 국가중 장기침체의 충격이 큰 대표적 사례는 그리스와 이탈리아다. 두 나라는 유럽의 후발 선진국이며 한 때 고성장을 통해 독일, 영국 등 선발국가들을 추격할 것이라는 기대를 주었지만 경기부진이 장기화되면서 선발국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더욱이 최근 남유럽 재정위기까지 겹치면서 그리스의 경우 이제는 선진국으로 분류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중남미 국가 중 브라질과 멕시코는 1960~70년대의 고성장을 통해 선진국 진입을 꿈꾸었다가 실패한 사례이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경험과 정책실패 사례도 살펴본다.
(1) 남유럽
그리스, 포퓰리즘과 경직된 노동시장이 장기침체 원인
그리스는 유럽 국가중 가장 극단적인 성장률 추락을 경험한 바 있다. 1960년대 평균 8%의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70년대 5.5%로 다소 둔화되었다가 80년대 0.8%로 성장세가 급락한 바 있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화로 그리스 경제는 그리스 신화 중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에 비유되곤 했다. 1960~70년대 높은 성장으로 유럽 내에서도 고소득국가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그리스는 80년대 이후 줄곧 유럽국가의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성장을 지속하면서 주변국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스는 생산성의 저하 속도가 매우 급격했다(<그림 8> 참조). 유로뱅크 분석에 따르면 그리스의 총요소생산성은 1960~1973년 기간중 6.5%씩 성장해 일본이나 스페인, 이탈리아 등 주요 선진국가들을 상회했으나 70년대 후반에는 2.0%로 크게 떨어졌고 80년대 이후 큰 폭의 마이너스 증가세로 돌아섰다. 1, 2차 오일쇼크 기간 중의 수요위축으로 많은 국가들이 생산성 저하를 겪었지만 특히 그리스의 충격이 컸던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연구결과가 제시되는 데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점은 과도한 임금상승과 재정의 방만한 운용, 무역 폐쇄성 등이다.
그리스는 1974년 민주정권 수립 이후 정치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과도한 선심성 정책들을 남발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실질임금이 생산성 증가 이상으로 빠르게 확대되면서 비용 상승 및 기업경쟁력 저하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리스의 제조업 수익성은 1976~80년 6.0%에서 1982~86년 -6.8%로 떨어졌으며 수익성 저하는 큰 폭의 투자위축으로 이어졌다. 70년대 초반까지 두 자리 수 증가를 기록하던 투자는 장기간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는데 1974년의 투자규모로 돌아오는데 무려 13년의 기간이 소요될 정도였다.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으로 빠르게 유입되던 외국인 직접투자도 크게 둔화되었다.
이와 함께 그리스는 1990년대까지 고용보호 입법이 강해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 중 하나였다는 점도 지적된다. 근로자 해고절차가 까다롭고 임시직 고용에 대한 제한이 커서 고용비용이 높았으며 이에 따라 기업부문의 고용이 제약되었고 자영업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80년대초 유럽공동체(EC)에 가입했지만 부족한 투자와 높은 노동비용으로 인해 역내수출이 크게 늘지 못하는 등 통합의 수혜를 별로 누리지 못했다.
선심성 정책에 따른 재정적자 누적도 경제회복을 어렵게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그리스는 70년대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재정흑자를 유지했으나 1980년대에는 GDP의 10%에 달하는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면서 국가부채가 급증했다(<그림 9> 참조). 또한 1990년대 EMU 가입을 위한 재정적자 축소 과정에서 교통이나 통신, 발전 등 공공인프라 투자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해 부족한 인프라 투자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이다.
이탈리아, 산업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제조업 경쟁력 저하
이탈리아는 큰 경제규모와 높은 성장으로 한 때 독일, 일본과 함께 미국에 이어 세계경제를 주도해갈 국가로 인식되기도 했으나 1990년대 들어 성장속도가 빠르게 떨어졌다. 독일, 스위스 등과 함께 제조업 강국으로 분류되는 이탈리아는 제조업 부문에서의 세계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점이 저성장을 초래한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그림 10> 참조). 1990년대 이후 전자, 자동차, 기계 부문이 산업성장을 주도하는 세계적 흐름이 나타나면서 연구개발을 통한 빠른 기술발전과 대규모 설비확장을 통한 대량생산이 중요한 경쟁력의 관건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 내에서 소기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던 이탈리아는 부족한 R&D 투자로 인해 신기술 채택에 뒤처졌으며 규모의 경제 효과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그림 11> 참조). 소기업의 특성상 고객대응성 및 유연성이 높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변화하는 산업환경에서는 효력이 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이 경직된 노동시장으로 인해 임금상승이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신흥개도국과 힘든 경쟁을 해야 했다. 독일이 통일과정에서 동독과 동유럽 수요를 끌어들이고 일본 역시 중국의 수요를 활용했으나 이탈리아는 시장확대 효과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이탈리아 역시 과도한 재정적자가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 대규모 시위와 사회혼란을 무마하기 위한 방만한 연금 운용과 산업 보조금 지급, 공공부문의 고용 확대로 1970년대 중반 이후 GDP의 10%에 달하는 재정적자가 지속되면서 국가부채 비중이 1995년 120%까지 높아졌다. 정부예산으로 ‘사회적 평화를 구매’한 데 따른 대가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와 함께 취약한 인적 자본과 사회인프라도 이탈리아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이다. 이탈리아는 서유럽 12개국중 가장 낮은 고등교육 진학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공공운송과 상하수도 등 물적 인프라뿐 아니라 행정, 사법, 경찰 등 정부서비스도 열악해 산업경쟁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인구고령화 속도가 빨랐다는 점, 남부와 북부지역간 격차를 해소하지 못해 생산요소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도 이탈리아의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2) 중남미
브라질, 무리한 고성장 유지정책의 후유증 장기화
브라질은 1960년부터 오일쇼크 이전시기까지 연평균 9%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1960년대 중반 집권한 군부정권은 물가를 안정시키고 재정적자를 줄이는 등 안정적 성장기반을 갖추었으며 통화인덱스 도입으로 화폐가치를 낮게 유지하면서 제조업 수출을 확대시켰다. 정치경제 환경이 안정되면서 국내외 투자가 늘었고 모기지 금융 도입으로 건설투자와 관련 내구재 소비도 빠르게 확대되었다.
70년대 중반 1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세계경제의 고성장이 멈추면서 브라질도 수출둔화와 이에 따른 성장 저하를 겪게 되었다.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국가에 나타난 현상이었지만 브라질의 문제점은 환경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성장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브라질 군부정권 내에서는 낮은 성장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는데 이에 따라 10% 성장목표 하에 이를 달성하기 위한 여러 단기 정책들이 수행되었다. 오일쇼크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판단해 단기부양책을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통화 및 재정확장 기조를 강화하는 가운데 수출부진에 따른 생산차질을 보완하기 위해 수입을 억제하고 이를 국내생산으로 대체하는 수입대체 전략을 추진했다. 수출기업에게는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했는데 수출 1달러당 70센트 이상의 인센티브가 지급되기도 했다. 높은 보조금은 재정적자를 확대시키고 장기적으로 브라질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통화팽창에 따른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실질환율이 절상되면서 수출이 둔화되고 경상수지 적자도 누적되었다. 주요 제품에 대한 인위적인 가격동결을 시도했지만 인플레를 막지 못했으며 불확실한 경제환경 속에서 브라질 경제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면서 외국자본이 유출되었다(<그림 12> 참조).
인위적인 부양책을 통해 70년대 후반까지는 5% 이상의 성장을 유지했지만 80년대 인플레이션율이 세 자리수까지 급증하면서 불가피하게 실시한 통화긴축으로 경제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그림 13> 참조). 80년대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1% 대로 낮아졌으며 인구 일인당 성장률은 마이너스에 머물렀다. 브라질에서도 재정적자 축소 과정에서 인프라 투자가 줄어들면서 도로와 운송, 전력 등 성장에 필요한 주요 인프라 부족현상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멕시코, 보호주의 강화로 산업경쟁력 저하
멕시코 역시 확장정책을 통해 성장을 유지하려다가 실패한 사례이다. 국내신용과 해외차입으로 재정적자를 지속하다가 1980년대 초반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면서 남미 외채위기를 촉발시킨 바 있다. 멕시코 경제의 문제점으로 가장 크게 지적되었던 부분은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간섭이었다. 멕시코 정부는 2차대전 이후 ‘멕시코화(Mexicanazation)’ 기치하에 소비재 뿐 아니라 중간재, 자본재 등 비교우위가 확인되지 않은 산업부문에서 자국산업으로의 대체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였다. 섬유, 음식료, 신발 등 경공업부문과 화학, 철강, 시멘트 등 장치산업 부문에서 보조금 지급과 외국기업 진출 제한 등을 통해 보호주의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특혜를 받은 기업들의 과점화가 고착된 점이 멕시코의 경쟁력 약화 원인으로 지적된다. 과도한 규제와 관료주의로 새로운 기업설립이 어려워지고 과점체제의 기존기업들이 대외경쟁력을 잃어간 것으로 평가된다.
멕시코는 1994년 NAFTA 가입으로 수출주도 성장으로의 전환을 꾀했지만 성과는 기대만큼 높지 않았다. 통신, 운송 등 주요 인프라 부문에서의 독과점 시장이 생산비용을 높였고 취약한 금융시스템으로 신용창출이 부족해 민간부문의 투자를 저해했다. 이와 함께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여전히 커서 무역개방에 따른 수혜를 얻지 못했다는 점, 마약관련 사회혼란과 불안정성이 국내외 투자를 저해했다는 점 등이 멕시코 경제의 취약점으로 지목된다.
(3) 일본
수출경쟁력 하락과 고령화로 잠재성장능력 저하
일본은 다른 나라의 장기침체와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우선 오일쇼크나 금융위기와 같은 글로벌 경제충격이 아니라 부동산 버블붕괴라는 국내적 충격에 의해 위기가 촉발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장기침체를 경험한 국가들은 상당수가 높은 인플레를 경험했지만 일본은 유일하게 디플레이션을 겪은 바 있다(<그림 14> 참조). 침체 기간이 20년에 달해 상당히 길었다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침체기간이 긴 만큼 일본의 장기침체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장기침체를 직접적으로 유발한 표면적인 요인으로 1990년대에는 부동산 시장 버블붕괴에 따른 자산가격의 급격한 하락,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는 디플레이션이 지적된다. 그러나 일본경제가 이러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요 위축의 악순환에 빠져 오랜 기간 침체에 빠졌던 것은 성장을 견인하는 근본적인 힘이 계속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수출경쟁력이 급격하게 저하된 데 따른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은 엔화약세와 빠른 기술발전에 힘입어 자동차, 조선, 전기전자 부문에서 독보적인 성장세를 기록했지만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빠르게 진행된 엔고와 독일, 미국 및 우리나라 등 경쟁국가들의 부상으로 수출시장을 빠르게 잠식당했다(<그림 15> 참조). 일본기업들은 엔고를 극복하기 위해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기고 소재 및 부품 수출 중심으로 무역구조를 전환시켰지만 이는 일본내 제조업 공동화를 가속시키면서 수요위축을 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령화와 근로시간 축소로 노동투입이 크게 줄어든 점도 중요한 잠재성장력 저하 요인이었다. 일본의 고령인구 비중은 1990년 12.1%에서 2010년 23.0%로 두 배 가까이 높아졌다. 고령화로 생산가능인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산업 및 기술 혁신과 신시장 개척능력이 저하되면서 일본의 생산성 상승세가 낮아진 것으로 판단된다.
엔고와 디플레, 부채확대는 정책적 책임 커
일본 장기침체와 관련해 정책적인 실패도 중요하게 거론되는 주제이다. 일본은 남유럽 국가나 중남미 국가들에 비하면 포퓰리즘이나 부패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는 다양한 정책들을 제시하면서 장기침체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정부는 네 가지 측면에서 정책적 실패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급격한 엔고를 막지 못했다는 점이다. 플라자합의 이전 높은 수출증가에 따른 고성장을 향유하던 시기에 선제적으로 시장개방을 확대하고 유통시장의 폐쇄성을 제거해 수출과 수입의 균형을 추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플라자 합의 이후 내수확대를 통한 균형성장 계획을 발표했지만 시기적으로 늦었고 또 실질적인 개방 확대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통화정책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일본의 대표적 정책실패 사례로 거론된다. 80년대 중반 통화확장기에는 자산버블을 사전에 막지 못해 버블붕괴를 초래했으며 이후의 경기침체기에는 오히려 소극적인 완화정책으로 수요의 급격한 위축을 방치했다는 평가이다. 특히 인플레 중시의 통화정책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해 디플레 장기화를 초래했다. 2000년 디플레이션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자 바로 금리를 올려 재차 디플레이션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셋째, 지속가능하지 않은 재정지출 확대로 국가부채를 급증시킨 점이다. 이는 일본경제의 잠재성장률 저하를 인정하지 않고 무리하게 단기성장세를 높이려는 시도에 기인한 것이다. 단기적인 경제충격을 완화하는 데는 기여했지만 이러한 효과는 일시적이었으며 높은 정부투자는 민간투자를 제약해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렸다. GDP의 200%가 넘는 세계 최대의 부채규모는 현재까지도 일본경제의 아킬레스 건으로 남아 있다.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잠재성장력을 높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수출주도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수의 법령 제정과 종합개발계획 등을 통한 여가문화, 주거 부문에서의 내수확대를 추진했지만 수요를 고려하지 못한 인프라 구축과 지자체들의 계획을 종합하는 마스터플랜 부재 등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인구감소에 대한 대비도 미흡했다. 고령층에 편중된 복지계획으로 출산장려 정책을 충분히 시행하지 못했으며 이민에 대한 엄격한 규제로 외국인력을 활용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4) 독일과 네덜란드
노동비용 안정되면서 경쟁력 회복
독일과 네덜란드는 장기침체를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주요 선진국의 지위를 회복한 사례이다. 독일은 1992년부터 성장세가 급격히 낮아져 1990년대말까지 1%대 성장에 머물렀다. 통일에 따른 재정부담으로 세금부담이 커지고 금리가 높아지면서 민간투자와 소비 등 내수가 위축되었다. 통일과정에서 동독지역 노동에 대한 임금이 높아졌지만 생산성 증가는 서서히 이루어지면서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독일이 유럽의 병자에서 유럽을 구원할 구세주로 떠오르게 된 배경으로 2000년대 진행된 산업 및 경쟁환경 변화가 독일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00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전기전자와 자동차 등 내구재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가운데 개도국들이 전기전자 부문에 집중적으로 진입하면서 경쟁압력도 높아졌다. 독일은 기계 및 부품 등 중간재와 자본재 부문에 강점을 가진 만큼 개도국의 부품공급처로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도제시스템을 통한 오랜 숙련을 필요로 하는 독일 제조업은 모방이 쉽지 않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독일이 주력으로 하는 자동차 산업은 개도국의 진입이 적어 시장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그림 16> 참조). 이는 전기전자 부문에서 시장점유율을 크게 빼앗긴 일본과 비교된다.
이와 함께 유로화 체제 편입으로 수출확대에도 불구하고 화폐가치 절상을 피할 수 있었고 단위생산 비용의 상승이 높지 않았다는 점도 독일의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통독에 따른 어려움을 기업과 근로자가 함께 겪으면서 임금인상 요구가 줄어들었고 저임금의 동유럽국가와 생산관계가 밀접하다는 점도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2000년대초 추진한 하르츠(Harz) 개혁으로 노동시장 및 사회복지 제도를 개선한 점도 주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네덜란드는 노동시장 개혁으로 침체를 극복한 대표적 사례이다. 천연가스 유전 발견 이후 과도한 복지와 고임금으로 고실업과 경쟁력 약화 등 ‘네덜란드병’에 시달렸으나 1980년대 초반 바세나르 협약, 중앙협약 등을 통해 임금을 안정시키고 시간제 근로를 늘리는 등 노동시장을 개혁한 바 있다. 정부가 조정역할을 하는 가운데 노사가 적극적으로 합의하여 안정적인 변화를 이루어 냈으며 연금 등 복지제도 개선도 선제적으로 이루어내면서 정부개혁의 모범사례로 인식된다. 개혁 결과 노동비용이 낮아지면서 제조업 수출경쟁력이 회복되었고 시간제 근로 확산으로 여성노동력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서비스산업도 동반성장했다. 네덜란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3% 수준의 성장세를 회복했다.
3. 우리나라의 장기침체 가능성
우리에게 불리한 세계경제 환경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장기침체라고 불릴 정도의 상황은 겪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 두 차례의 위기 이후 성장세가 크게 떨어졌지만 3%대의 성장세는 유지하고 있다(<그림 17> 참조). 그러나 최근 경제환경 변화와 이에 따른 국내경제의 흐름을 살펴보면 과거 장기침체를 겪었던 국가들의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활력은 이전 기간에 비해 뚜렷하게 저하되었다. 2000년대 중반 세계경제는 5% 가까운 고성장을 기록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3% 초반의 성장에 머물고 있다. 세계경제가 과거의 활력을 되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부진이 더 심해지고 장기화될 수 있다는 장기침체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16페이지 참조). 세계교역의 위축은 더욱 심각하다. 세계교역액 증가율은 2000~08년 12.5%를 기록했지만 최근 3년간은 평균 1.2%에 머물렀다. 세계경제의 성장방식이 제조업 및 수출 중심에서 내수 및 서비스 중심으로 바뀌어가면서 수출을 통해 성장하던 국가들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오일쇼크 이후의 변화와 유사하다. 당시에도 성장 저하와 함께 교역의 위축이 심각했는데 1981년의 세계교역규모를 되찾는데 5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에 따라 원유 및 원자재 수출국가뿐 아니라 제조업 수출에 주력하던 다수의 국가들이 장기적인 성장저하를 경험했다.
산업환경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2000년대 호황기 우리 수출을 견인했던 전기전자, 자동차 등 내구재 관련 세계교역 비중이 금융위기 이후 뚜렷이 낮아졌다(<표 2> 참조). 2000~2007년중 전기전자제품의 교역비중은 20%를 넘었지만 최근 3년간에는 17%로 둔화되었으며 자동차도 비중이 2%p 가량 낮아졌다. 세계경제가 금융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위기기간 중 줄어든 내구재 수요가 별로 회복되지 못하면서 과거의 내구재 싸이클이 재현되지 못하고 있다. 장기침체 우려가 이어지면서 선진국 소비자를 중심으로 미래를 위한 저축이 늘어나고 필수적이지 않은 내구재 소비 비중이 줄어드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탈리아가 장치산업 중심의 주도산업 변화로 인해 제조업 경쟁지도에서 밀려났던 경험이 우리에게 재현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경쟁국가들이 빠르게 부상하면서 우리나라의 입지가 좁아지는 모습이다.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시장잠식이 본격화되고 있다. 2000년대 과잉설비가 우려될 정도로 대규모 투자확장에 나섰던 중국은 철강, 석유화학 등 소재산업 부문의 생산시설을 본격 가동하면서 그동안 우리나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던 부분을 자국산으로 빠르게 대체해가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디스플레이 등 전자부품과 스마트폰 등 첨단 제품에서 기술력을 크게 높여가며 우리제품의 위협적인 대체제가 되고 있다.
화폐가치의 빠른 약세를 배경으로 일본과 유럽국가들도 점차 우리와의 경쟁강도를 높여가는 모습이다. 최근 일본과 유럽경제가 회복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이들 지역에 대한 수출은 두 자리수의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상대환율 변화로 우리 제품의 가격 우위가 이들 지역에서 낮아졌기 때문이다. 산업지도의 변화와 우리나라 경쟁력 저하로 인해 전세계 수출 중 우리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1년 2.8%를 피크로 상승세를 멈추었다(<그림 18> 참조).
위기 후 증후군 나타나는 중
이와 같은 세계경제 환경의 변화로 우리 수출은 성장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 대부분의 경기상승 국면이 수출에 의해 이끌어져 왔다. 1970년대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 10차례의 경기순환 중 8차례는 수출주도 성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건설투자와 소비가 이끌었던 1980년대말과 2000년대 초반은 부동산 경기 과열과 과소비에 따른 거품 논란이 컸으며 신용카드사 부실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내수의 규모가 크지 않고 내수산업의 발전이 미흡해 성장을 주도할 여력이 높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우려되는 것은 위기 후 증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수요위축의 악순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가계의 평균 소비성향은 2010년 이후 급격하게 떨어져 지난해에까지 하락세가 지속되고 있다. 위기 이후의 미래불안감으로 저축을 늘리고 소비를 줄이는 가계의 대응이 경제 전체적으로는 수요위축을 초래해 성장과 소득을 떨어뜨리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부동산 대세상승 신화가 종료되면서 가계는 더 많은 노후대비 자산을 필요로 하고 있다. 저성장이 장기화 될 것이라는 예상이 확산되면서 소비성향 저하 현상은 당분간 이어질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일본에서도 성장률이 뚜렷이 저하되기 시작한 80년대부터 1990년대말까지 15년간 지속적으로 소비성향이 낮아진 바 있으며 이는 침체를 더 깊게 하는 역할을 했다.
총요소생산성의 성장기여도 급격한 저하
이와 같이 부정적인 환경 변화로 인해 우리경제의 잠재성장 능력이 크게 낮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성장회계 방식을 이용해 분석해보았다(<표 3> 참조). 2011년부터 2014년의 4년간 우리나라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3.0%였는데 위기 이전인 2000~2008년의 평균 성장률 4.6%를 하회한다. 생산요소의 투입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기간 중 성장기여도가 가장 크게 하락한 부문은 생산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총요소 생산성의 성장기여도는 1.1%p 하락해 성장률 저하의 대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장기침체를 경험한 국가들과 유사한 결과이다. 자본의 성장기여도 역시 0.7%p로 크게 낮아졌으며 노동의 경우는 오히려 기여도가 0.3%p 높아졌다.
생산성 증가속도가 크게 떨어진 원인으로 우선 그동안 생산성 상승을 주도했던 수출제조업의 활력이 약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산업별 성장률을 보면 서비스업의 경우는 위기 전후의 성장률이 1.9%p 하락하는 데 그쳤지만 제조업 성장률은 3.4%p 하락했다. 더 큰 문제는 제조업 내에서도 생산성 상승속도가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산업별로 성장요인을 분석해보면 제조업 부문에서 생산성의 성장기여도는 위기 이전 6.6%p에서 2011~13년 기간 중에는 2.1%p로 낮아졌다(<표 4> 참조).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장치산업 부문에서 대규모 투자 및 생산을 통해 규모의 경제 효과를 누리던 성장전략이 이제는 유효하지 않게 된 데 따른 측면이 크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2000년대 중국을 비롯한 개도국들이 우리나라와 유사한 산업부문에 진출하면서 세계적으로 공급과잉이 우려될 정도로 설비가 크게 늘었고 이는 결국 동일한 자본투자의 수익성을 떨어뜨리는, 즉 자본의 한계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 자본의 한계생산성은 1990년대 빠르게 하락한 바 있으며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낮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제조업과 함께 건설업 부문에서도 생산성 저하가 심각했다. 건설업의 경우 2000년대 위기 이전까지도 총요소 생산성 증가율이 제로수준에 머물렀는데 위기 이후에는 평균 -2.8%로 떨어졌다. 건설수요는 늘지 않는 가운데 공급이 과도하게 이루어지면서 기업간 경쟁이 확대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서비스업도 요소생산성이 제로 가까운 수준으로 낮아졌는데 이는 노동 투입 확대가 주로 생산성 증가속도가 낮은 전통서비스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노동투입을 통한 성장 한계
우리나라는 현재 노동투입 확대가 성장을 이끌어가는 형국이다. 지난 4년간 우리나라의 취업자 증가수는 평균 44만명에 달해 위기 이전 호황기의 39만명을 오히려 상회했다. 그러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우리경제가 노동투입을 계속 늘리기는 쉽지 않다. 고용증가가 대부분 은퇴연령을 중심으로 전통적 서비스업 부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부문의 생산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까지 빠른 고용증가를 보였던 도소매업이나 개인서비스업의 고용이 올들어 이미 크게 둔화되었으며 자영업자수도 줄어들고 있다. 올해 4월까지 취업자 증가수가 평균 30만명 수준으로 낮아진 상태이다.
중기적으로 보면 노동투입 여력은 더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 통계청의 장래인구 추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5~64세 생산가능 인구는 2017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설 전망이다. 정부가 고용률 제고 정책을 강조하고 있지만 고령인구 비중이 계속 높아지는 데다 높은 진학률로 취업개시연령이 높다는 점으로 인해 고용률 확대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인 근로시간도 지속적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고용률의 완만한 상승을 가정하더라도 우리나라 노동투입의 성장기여도는 2015~2019년 기간중 0%p로 둔화되고, 2020~2030년 중에는 -0.5%p로 하락할 전망이다. 만약 현재와 같은 자본투입 둔화 추세와 생산성의 낮은 성장기여도가 유지된다고 가정할 경우 향후 5년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2%대 중반으로 위축되고 2020년대에는 1% 중반으로 낮아지게 된다(<그림 19> 참조). 우리 경제의 생산성을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우리나라도 조만간 장기침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4. 정책방향
현재와 같은 어려운 수출여건과 경쟁력 저하 현상이 지속된다면 우리경제는 조만간 장기침체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살펴본 국가의 사례를 바탕으로 우리 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지지 않기 위한 정책을 정리해본다.
첫째, 경제의 비효율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구조개혁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남유럽이나 중남미 등 성장의 기로에서 주저앉은 국가들에서는 경직적인 노동시장과 비효율적인 공공부문이 경제의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경쟁력을 약화시킨 요인이 되었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노동시장 부문에서 국가 경쟁력이 하위권에 머물고 있으며 특히 노사관계나 해고비용 측면에서는 60개국중 50위 이하로 낮은 수준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것은 부족한 인적 자본의 활용도를 높이고 산업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제이다. 민간부문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지는 공공부문 개혁도 과감하게 추진하여 경제의 전반적인 생산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둘째, 경제의 장기적 체질을 약화시킬 수 있는 단기적 처방, 즉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한다. 중남미 사례에서 보듯이 경제환경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과거의 성장세를 지속하기 위해 대증적 처방을 남발하는 것은 경기침체를 더 장기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지만 단기적 효과는 큰 재정지출 확대나 부동산 시장 부양의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과거 사례에서 나타난 것처럼 건설이나 재정을 통한 성장은 이후의 침체를 더 깊게 할 수 있다. 남유럽 재정위기 사태에서 배웠듯이 지속가능한 연금제도로의 개혁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셋째, 변화하는 국내외 경제환경 속에서 성장을 이끌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을 찾아야 한다. 우리 국민들이 필요로 하지만 시장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 소비하지 못하는 분야에서 적극적인 시장창출 노력이 요구된다. 여가문화와 의료건강 분야에서 소비를 제약하는 규제를 과감하게 풀고 부족한 인프라를 늘려야 한다. 현재 단편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내수서비스 활성화 정책을 더욱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설계하여 대대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넷째, 수출부문의 경쟁력을 높이는 노력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수출의 성장주도력이 낮아지면서 최근 상대적으로 제조업과 수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모양새이다.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수출경쟁력이 너무 급격하게 떨어질 경우 수출을 통한 소득창출이 어려워지면서 내수기반이 약해지게 된다. 공공부문의 기초 R&D 투자를 확대해 과학기술의 토대를 높이고 제조업 혁신을 유도하는 환경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경상수지 흑자 누적으로 원화절상이 지속되지 않도록 시장개방을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고령화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대비가 필요하다. 저출산에 따른 노동인력 감소가 성장잠재력 저하뿐 아니라 재정악화, 연금고갈 등 심각한 부작용을 가지고 올 것이 명약관화하지만 아직 도래시점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대응책이 미비한 수준이다. 세계 최저수준의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출산 및 육아에 대한 예산지원 비중을 현재보다 크게 높이고 사교육비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와 함께 외국의 근로인력을 활용하고 이민유입을 확대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끝>
'■ 경제보고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판 창조경제 ‘대중창업, 만인혁신’, 사상 최대의 창업붐 조성되고 있다 (0) | 2015.05.27 |
---|---|
◎웨어러블 시장 커질수록 생체인증 뜬다 (0) | 2015.05.26 |
◎경기 부진하고 자금 안 돌아도 중국발 양적완화는 없다 (0) | 2015.05.20 |
◎스타트업·벤처 시장에서 헬스케어가 부상하고 있다 (0) | 2015.05.18 |
◎미국 성장세 둔화에도 연내 금리인상 여전히 유력 (0) | 2015.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