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영국의 사례에서 본 규제개혁'
세계은행의 기업규제평가에서 한국의 순위가 상승세를 보여 왔지만 기업들이 체감하는 규제 개선은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반면 영국의 경우 최근 규제개혁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제개혁 과정에 민간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규제개혁 대상도 매우 광범위하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영국은 2010년 이후 규제비용 총량제 등을 통해 규제개혁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지표로 본 우리의 규제 수준은?
● 세계은행의 지표와 IMD/WEF 지표
최근 규제개혁에 대한 관심이 크다. 규제개혁이 필요하다는 사회적인 합의 아래 정부는 1998년 규제개혁위원회를 설립하는 등 규제개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규제개혁 노력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라마다 규제는 워낙 수가 많고 경제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각국의 규제 환경을 비교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국제적으로는 세계은행(World Bank)의 기업규제평가(Doing Business)와 WEF의 국제경쟁력 지수(Global Competitiveness Index), IMD의 국제경쟁력 순위(World Competitiveness Ranking) 등이 각국의 규제 환경을 비교하는 지표로 사용되고 있다. 민간단체인 WEF와 IMD의 국제경쟁력 지표는 규제 이외에도 다양한 경쟁력 요인을 함께 조사하여 발표한 지표이지만, 각국의 규제 환경을 비교하는 지표로도 많이 활용된다. 조사대상국의 수를 보면 세계은행은 189개국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WEF와 IMD는 148개국과 60개국을 조사 대상으로 한다. 조사대상국의 수는 세계은행보다 적지만 우리가 관심을 많이 가지는 소득이 중위권 이상인 나라들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대한 평가는 기관마다 결과가 상당히 다르다. 과거에는 세 지표 모두 20위권으로 비슷했는데 최근에 세계은행의 순위가 7위로 상승하였다. 반면 WEF와 IMD 조사에서는 여전히 25위와 22위에 머무르고 있다(2013년 기준). 세계은행은 최근에 우리 나라의 규제 환경이 개선되었다고 평가한 반면, IMD는 다소 개선, WEF는 후퇴한 것으로 보았다.
● 세 기관의 평가가 다른 이유
세 기관의 결과가 다른 것은 특정 기관의 조사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조사 방법의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은행은 창업과 건설 등 전형적인 10가지 규제 영역을 대상으로 허가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 절차의 수 등을 지수화하여 비교한다. 조사하는 규제의 종류가 많지 않지만 객관적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세계은행은 비교하는 기준이 명확하기 때문에 개선 대상이 되는 규제도 명확하다. 각국은 세계은행의 지표를 근거로 해당 규제 개선에 추진력을 얻기도 하였다. 세계은행이 기업규제 평가를 실시하는 목적도 각국의 규제개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정부도 지난 10년간 세계은행의 순위를 의식하면서, 회사법(상법)을 개정하고 통합도산법과 동산담보법 등을 제정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를 통해 세계은행의 기업규제평가 순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세계은행 지표에서 선진국 중에 15위에 그치고 있는 일본도 2020년까지 선진국 중 3위 내로 순위를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반면 WEF와 IMD는 통계적 지표에 더해 기업인들의 설문 조사를 반영해 순위를 산정한다. 기업인들의 설문 조사를 함께 반영하는 IMD와 WEF의 순위는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자주 듣지만, 규제 수준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세계은행은 주요 10개 영역만 조사하지만, IMD와 WEF는 기업의 설문 조사를 바탕으로 기업의 전체적인 부담 수준을 파악하기 때문에 규제의 질적인 측면을 평가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조사 방법의 차이 때문에 3개 기관의 결과는 다르지만, 그 결과는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조사 방법의 차이 때문에 선진국 중에서는 규제 자체는 복잡하고 많지만 규제를 투명하고 예측력 있게 운영함으로써 세계은행의 순위보다 IMD와 WEF의 순위가 좋은 나라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안전과 환경규제가 엄격한 독일은 세계은행에서는 21위이지만 WEF와 IMD의 조사에서는 각각 4위와 9위를 차지하고 있다. 거꾸로 신흥국에서는 법률과 규정 그 자체보다 그 실행 과정에서 직면하는 부정부패가 경제에 더 큰 부담이 되는 경향이 있다. 법률에 적혀 있는 규제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지만, 부정부패가 심각한 나라라면 세계은행의 평가보다는 IMD와 WEF의 평가가 나쁘게 나온다.
지표들을 보면 우리 정부는 세계은행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규제들을 개선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지만, 전체적인 규제 환경을 개선하는데 다소 미흡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리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업들이 체감할 수 있는 규제 개선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민간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영국의 규제개혁
사실 우리나라도 규제개혁을 위한 제도적인 기틀은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다. 1998년에 설립한 규제개혁위원회를 중심으로 규제개혁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일정한 성과도 이루어 냈다. 그러나 WEF와 IMD의 결과에 나타났듯이 기업들이 체감하는 규제개혁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OECD에 따르면 우리뿐만 아니라 OECD 회원국 대부분이 규제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그 가운데 영국은 규제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하고 있고,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규제개혁은 국민과 기업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으며, 개혁하려는 규제의 범위도 넓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2010년 이후 기업들의 체감지수를 반영하는 IMD와 WEF의 순위도 상승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 민간 주체들의 적극적인 참여
규제개혁의 핵심은 무엇보다 규제영향평가(impact assessment)라고 할 수 있다. 현재 OECD 회원국 대부분이 도입한 규제영향평가는 규제를 신설할 때 규제의 비용과 편익을 분석하여 도입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이다. 우리와 영국 모두 규제영향평가를 도입하고 있고, 절차도 대체로 비슷하다. 그러나 실제 과정을 살펴보면 영국은 민간 주체들이 활발하게 참여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입법단계는 6단계로 구성되는데, 규제영향평가는 그 중 대안선택, 협의단계(consultation), 최종제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중 협의단계에서 기업들의 설문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해당 규제의 도입으로 기업들이 입게 될 부담과 이익을 상세히 파악한다. 설문 조사를 통해 해당 규제가 기업에 미칠 수 있는 직간접적인 비용들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중소기업들에 대한 배려는 더욱 두드러진다. 중소기업 규제영향평가제도(Small Firms Impact Test)는 해당 규제가 중소기업과의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중소기업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근거를 제시하도록 하고 있다.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대기업보다 규제의 부담이 크기 때문에 이러한 절차를 둔 것이다. 기업들의 설문 조사와 보고를 바탕으로 각 부처는 매뉴얼에 따라 규제영향평가서를 작성한다. 이처럼 정부가 일방적으로 규제의 도입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부문의 의견과 부담을 고려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담당 부서가 기업의 의견을 반영한 규제영향평가서를 작성하면 산업부 소속의 규제위원회(Regulatory Policy Committee)가 규제영향평가서의 적절성을 심사한다. 우리나라의 규제개혁위원회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만약 협의 과정에서 기업들의 참여가 미진할 경우 규제위원회는 해당 부서가 작성한 규제영향평가서를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해당 규제 도입을 보류할 수 있다. 규제위원회가 각 부처가 작성한 규제영향평가서를 적절하다고 판단하면 이후의 입법절차가 진행된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규제를 도입하면, 도입 이후 3~5년 뒤에 재심사(Post-Implementation Review)를 한다. 규제를 도입하기 전에는 경제에 주는 부담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규제 시행 이후에는 관련 통계를 수집하여 부담을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모든 과정에서 작성한 규제영향평가서는 모두 인터넷에 공개하여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 개혁의 대상이 되는 규제의 범위가 넓다
영국에서는 규제영향평가의 대상이 되는 규제의 범위가 넓다. 국민과 기업에게 부담이 되는 모든 규정들이 규제영향평가의 대상이 된다. 우리나라도(행정규제기본법)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법령을 모두 규제로 보지만, 실제 규제영향 평가의 대상을 비교하면 영국이 넓다.
구체적으로 보면, 영국에서는 정부가 직접 기업에 부담을 주는 환경 기준이나 건설 허가와 같은 전형적인 행정규제뿐만 아니라 민법이나 회사법도 기업에 부담이 된다면 규제영향평가의 대상이 된다. 영국은 2006년 회사법을 전면 개정하였을 때 규제영향평가를 하여 연간 2.5억 파운드의 편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추정하여 회사법 개정을 적극 추진하였다. 민법이나 회사법과 같은 민사법은 규제가 아니라고 보아 규제영향평가에서 제외하는 우리와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영국은 비용편익의 대상을 명시적인 법규정으로 한정하지 않고 가이드라인이나 모범지침(code of conduct)도 경제 주체에 부담을 준다면 규제영향평가를 하고 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기업에 부담이 되는 모든 것을 규제영향평가의 대상으로 심사하여 도입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 규제비용 총량제, red tape challenge
2010년에 집권한 보수당 정부는 앞에서 살펴본 기존 규제개혁 체제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강력한 규제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금융위기와 유로위기로 저성장에 빠진 영국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규제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먼저 2010년 영국 정부는 규제비용 총량제(one-in one-out)를 도입하였다. 규제비용 총량제는 새롭게 도입할 규제가 비용을 야기한다면, 야기한 비용만큼을 상쇄할 수 있도록 기존의 다른 규제를 폐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기업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규제의 비용 통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2013년 1월에 one-in two-out으로 제도를 변경하였다. 새로운 규제 도입으로 기업 부담이 늘어난다면, 늘어난 비용의 두 배를 상쇄할 수 있도록 기존 규제를 폐지하도록 한 것이다. 규제비용의 총량을 유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감축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아예 규제면제제도(micro-business moratorium)를 한시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2011년 4월부터 2014년 4월 사이에 의회와 정부가 제정한 규제는 일정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예 중소기업에 적용되지 않는다. 중소기업은 규제가 야기하는 비용을 부담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작기 때문에 아예 중소기업 규제면제제도를 한시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2011년 4월에는 red tape challenge를 도입하였다. 기업과 국민들이 문제를 제기한 규제들을 검토하여 폐지하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 제도 역시 민간 주체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운영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규제영향평가는 새로운 규제를 도입할 때만 적용되는 것이지만, 기존의 규제 가운데 경제적인 근거가 없는 규제를 폐지하는 제도는 아니었다. red tape challenge제도는 기업과 국민들의 참여를 통해 기존의 규제까지도 개선하는 제도인 것이다. 영국 정부는 2014년 1월까지 3만건의 제안을 받아, 3000여건의 규제를 폐지하거나 개선하여 기업들의 연간 부담을 8억5천만 파운드 감소시켰다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영국의 규제개혁도 한계가 있다. EU체제 하에 있다 보니 EU가 국내법으로 제정하도록 규정하는 법규(Regulation, Directives)를 영국이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한다. 많은EU 법규들이 기업에 부담을 주고 있지만 EU 체제에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한 2010년 집권한 보수당 정부가 규제개혁을 워낙 빠르게 시행하다 보니 해당 부서가 작성한 규제영향평가서의 질이 낮아졌다는 보고도 나오고 있다. 해당 부서가 작성한 규제영향분석서는 작성 이후 규제위원회로 넘겨져서 다시 심사를 받게 된다. 규제위원회는 자신들이 심사한 규제영향평가서 가운데 2012년에는 81%가 적합했는데, 2013년에는 75%만이 적합하다고 평가하면서 분석 수준이 저하되었다고 보고 있다. 또한 red tape challenge에서 폐지한 규제들의 상당수는 사문화된 조항들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 정부들은 규제개혁을 통해 잠재성장력을 높이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영국 역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민과 기업의 적극적인 참여 아래 광범위한 영역에서 규제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결과 기업의 체감지수를 나타내는 WEF와 IMD의 지표에서 영국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규제비용 총량제, 중소기업 규제면제제도, red tape challenge와 같이 새로운 규제개혁 방안을 도입한 경험을 우리의 규제 개혁 과정에서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규제개혁은 양적인 측면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경제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실제 체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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