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노화를 잊은 ‘동안(童顔) 기업’의 비결'
한국 기업들이 고령화되고 있다. 이미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 중 절반 이상이 설립 40년을 넘겼다. 불과 10년 전인 2005년에는 설립 40년 이상의 회사가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상장기업의 평균 연령 역시 지난 10년 사이 5년 가량 높아져 설립 38년에 바짝 다가섰다. 특히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제조업의 고령화가 더욱 심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고령화는 연륜과 빈틈없는 시스템으로 무장한 기업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바람직할 수도 있다. 산업을 이끌고 있는 우량 기업들 중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기업이 많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과거와 완전히 다른 환경 속에서는 과거의 경험보다 혁신이 더 중요하다. 우량 장수 기업들 역시 장수보다 혁신으로 더욱 명성을 얻고 있는 기업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혁신 기업들은 새로운 사업모델로 시장을 흔들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조직의 노화를 막지 못해 혁신과 변화의 의지를 잃게 된다면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조직이 노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단이 필요하다. 노화를 적절히 관리하지 못한 조직에는 여러 증상이 나타난다. 오랜 세월 누적된 불필요한 규정과 계층은 조직을 느리게 만든다. 과거의 방식에 집착하게 해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거부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도 한다. 조직 안팎의 해묵은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실행력이 떨어지기도 한다.
오랜 나이에도 불구하고 혁신을 거듭하며 젊음을 유지하는 기업들에게서 그 비결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꾸준한 변화를 추구한다. 새로운 시도를 위해 별도의 조직을 운영하거나, 지속적인 변화를 위한 원칙을 설정하는 것이 그 예다. 한편으로는 조직의 기반인 고객의 변화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조직을 날렵하게 유지한다. 결국 변화를 향한 열망, 그리고 고객과 기본에 충실한 경영이 세월의 흐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인 것이다.
< 목 차 >
1. 빠른 속도로 진행중인 한국 기업의 고령화
2. 기업에게도 노화 방지가 필요하다
3. 노쇠한 조직의 몇 가지 증상
4. 젊음을 유지하는 기업의 비결
동안(童顔) 전성시대다. 동안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많이 회자되던 시기도,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시기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장수는 기본이고 젊음까지 유지해야 진정 잘 산다고 할 수 있는 시대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영혼을 건 계약을 맺고 젊음을 얻었다는 파우스트는 시대의 변화를 미리 읽었는지도 모른다.
조직도 젊음을 원한다. 많은 경영자가 ‘젊은 조직’을 힘주어 외친다. 젊음을 향한 간절함과 열망만큼은 조직도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궁금해진다. 과연 우리 기업들은 젊음을 유지하고 있을까?
1. 빠른 속도로 진행중인 한국 기업의 고령화
한국 기업들의 고령화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의 평균 연령을 분석해 보았다.
절반 이상의 기업이 마흔을 넘겨
설립일을 기준으로 우리 기업들의 연령 분포를 살펴보았다(<그림 1> 참조). 2015년 12월 기준으로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되어 있는 기업 중 절반이 넘는 51.5%의 기업이 설립 후 40년 이상 지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 전체의 평균 연령은 설립 37.8년이다.
이 결과를 10년 전인 2005년 말 기준의 대한상공회의소 조사결과와 비교해 보았다. 당시 설립 40년을 넘긴 상장기업의 비중은 32.1%였고, 상장기업의 평균 연령은 32.9세였다.
요약해 보면 최근 10년 사이 상장기업들의 평균 연령은 약 5세 상승하고, 40세 이상 상장기업의 비중도 20%포인트 가까이 큰 폭으로 커진 것이다. 10년 전에는 상장기업의 2/3 이상이 설립 40년이 안된 기업이었지만, 이제는 반 이상의 기업이 이미 불혹을 넘겼다.
설립 20년 이상 40년 미만 기업의 비중이 큰 폭으로 작아진 것도 눈에 띈다. 2005년에는 전체 기업의 절반 정도(49.6%)가 이에 해당 했으나, 10년 만에 5분의 1에 턱걸이 하는 수준(23.9%)으로 줄었다. 사람으로 치면 가장 활발한 20대와 30대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제조업의 고령화가 두드러져
이번에는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을 제조업과 비제조업으로 나누어 평균 연령을 살펴 보았다(<그림 2> 참조). 제조업과 비제조업간의 상당한 평균 연령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역시 올해 12월 기준으로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 중 제조업을 영위하는 기업의 평균 연령은 설립 39.9년으로 마흔에 바짝 다가섰다. 반면 비제조업 기업의 평균 연령은 34.9년으로 제조업보다 평균 5년이 낮다. 설립 40년 이상 지난 기업의 비중도 제조업이 57.1%로 비제조업의 43.9%보다 훨씬 높다.
상대적으로 젊다고 할 수 있는 설립 20년 미만의 기업만을 대상으로 제조업과 비제조업을 구분해 봤다. 설립 20년 미만 기업 중 제조업의 비중은 44.3%로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전체 상장기업 중 제조업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보다 훨씬 높은 57.5%이다. 젊은 기업 중에는 제조업이 상대적으로 더 적은 것이다.
물론 기업의 평균 연령 증가가 곧 문제라는 단순한 결론은 곤란하다. 기업의 진입과 퇴출, 그리고 경제와 산업의 변동 등 다양한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젊은 기업 중 제조업의 비중이 낮은 것 역시, 정상적인 산업의 변화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지난 10년 사이 우리 경제를 주도하고 있는 주요 기업들이 점차 고령화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특히 아직도 경제 전반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제조업 기업의 고령화가 더욱 심각하다는 사실은 경제와 산업의 활력과 관련해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기업에게도 노화 방지가 필요하다
기업은 생물과 달리 수명의 한계가 없다. 굳이 ‘계속 기업(going concern)의 가정’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영속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기업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100세를 넘긴 장수 기업들이 있고, 일본이나 유럽에서는 수백 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초장수 기업까지 찾아볼 수 있다.
기업이 고령화를 반드시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다양한 경험과 다져진 시스템을 무기로 더욱 빈틈없는 기업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산업을 이끌고 있는 기업 중에는 연륜을 과시하는 전통의 강자들이 많다. 미국의 산업을 대표하는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Dow Jones Industrial Average)를 봐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지수를 구성하고 있는 30개 우량 기업의 평균 연령은 100세가 넘는다. 1900년대 이전에 세워진 기업도 13개나 된다(<표 1> 참조).
그러나 그런 장수 우량 기업이 되는 영광은 결코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를 구성하는 우량 기업들 대부분이 장수보다는 혁신 이미지로 더욱 명성을 얻은 기업들이다.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존경 받는 것이 아니다. 멈추지 않고 혁신을 해 왔기에 오랜 기간 살아남으며 최고의 기업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혁신 없이 나이만 먹은 기업에게는 절대 그런 자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특히 환경이 안정적이지 않을 때 더욱 그렇다. 이제껏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환경으로의 변화 속에서는 어설픈 경륜이 자산이 아닌 부채가 될 때가 더 많다. 과거에 바탕을 둔 경험과 경직된 시스템이 의사결정을 잘못 이끌거나, 적응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거기에 관료주의나 타성까지 조직에 뿌리를 내렸다면 환경 변화에 더욱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젊음으로 무장한 신흥 기업들의 도전은 거세지고 있다. 포브스(Forbes)지가 선정한 2015년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The World’s Most Innovative Companies)’ 순위를 보면 상위 20개 기업 중 80%에 해당하는 16개 기업이 설립 30년이 안된 청년 기업이다(<표 2> 참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이들 혁신 기업들은 전혀 새로운 제품이나 사업모델로 시장을 흔들어대고 있다.
이제 젊음을 잃은, 다시 말해 혁신 의지를 잃은 연륜만으로는 시장에서 설 자리를 찾기 어렵다. 리처드 포스터(Richard Foster) 미 예일대 교수가 기업들이 S&P 500 리스트에 머무르는 기간이 1920년대 평균 67년에서 현재는 15년 내외로 급격히 줄어 들었다는 지적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래된 기업이라는 사실은 이제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 기업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리 기업들은 수백 년간 명성과 노하우를 쌓아온 해외의 우량 기업과는 입장이 다르다. 엄청난 변화를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브랜드 파워와 고객 기반을 아직 다지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무장한 젊은 혁신 기업들과도 전 세계를 무대로 싸워야만 한다.
그런 관점에서 기업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 기업들의 과제는 분명하다. 무엇보다 젊어야 한다. 조직의 노화를 막아 혁신을 지속할 능력을 유지하면서 그간의 경험과 경륜을 지렛대 삼아 경쟁해야 한다. 기업이 노화를 방지하려 노력해야 하는 까닭은 단지 젊음이 좋아 보여서가 아니다. 생존을 위해 조직은 경륜은 물론 젊음, 즉 혁신하는 능력까지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노쇠한 조직의 몇 가지 증상
흐르는 시간은 노쇠 현상을 부른다. 이를 적절히 관리하지 못하면 결국 소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기업이나 생명체 모두에게 해당되는 숙명이다. 경영의 구루 짐 콜린스(Jim Collins)는 기업이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모순이 내부에 누적되어 조직이 몰락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노쇠한 조직은 결국 변화와 혁신의 동력을 상실한 조직이다. 이미 노쇠했다면 오랜 기간 쌓아온 경험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주로 조직의 노화에 따라 발생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몇 가지 노쇠 현상을 살펴보자.
● 복잡한 주름과 두터운 군살
세월은 조직에도 흔적을 남긴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복잡하고 실효성 없는 규정과 절차, 그리고 역할과 책임이 불분명한 계층과 조직들이다. 결코 반가울 수 없는 흔적이다.
스탠퍼드대의 로버트 서튼(Robert Sutton) 교수도 저서 『Scaling-Up』에서 조직이 성장하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일을 방해하고 어렵게 만드는 계층, 부서, 복잡한 절차와 과정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역사가 긴 조직일수록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절차, 규정, 계층, 그리고 조직 모두 만들기보다 없애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쌓여가기 때문이다.
나쁜 뜻으로 만들어진 규정과 절차, 그리고 조직은 없다. 모두 나름의 목적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계속 쌓여만 가고,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면 문제다. 조직은 점차 느리고 무거워지며, 관료주의에 빠지기 쉽다. 구성원들은 경쟁자가 아닌 내부의 절차와 규정을 상대로 싸운다. 최근에는 이런 기업 조직을 이른바 ‘크고 멍청한 회사(Big Dumb Company)’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성원들이 아이디어를 짜내도, 그것이 길고 복잡한 절차와 조직을 거쳐 시장에 출시될 때쯤이면 이미 기민하고 유연한 스타트업이 시장을 쓸고 간 후다. 승자가 독식하는 시장은 굼뜬 조직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고객과 현장의 목소리가 복잡한 조직과 절차를 뚫고 들어오는 것도 어렵다. 고객과 현장을 모르는 경영진의 의사결정은 결국 사업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주름과 군살이 조직의 감각기관까지 마비시킬 수 있는 것이다.
● 미래의 발목을 잡는 왕년의 성공
오랜 기간 살아남은 기업에게는 나름의 성공 방정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성공체험은 귀중한 자산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 과거 방식의 집착이나 새로운 시도의 거부로 변질된다.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노화가 진행되면서 장기기억은 유지되지만 새로운 것을 익히는 능력은 떨어지게 된다고 했다. 유사한 현상이 조직에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성공체험은 지혜의 보고가 될 때 가치를 지닌다. 만약 새로운 것을 배척하는 이유가 되면 그때는 장애물일 뿐이다. 꼭 필요한 새로운 방식을 외면하고 과거에 집착하고 매달리다 변화의 때를 놓칠 수 있다.
과거 성공의 그늘에서 신사업의 싹이 마르는 경우도 발생한다. 규모를 자랑하는 탄탄한 기존 사업의 관점에서 신사업을 바라보는 것이다. 높아진 눈으로 아직 미약한 신사업을 바라보면 ‘그런 하찮은 사업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견해가 나오기 쉽다. 힘없고 작은 신사업은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에서도 밀리기 일쑤다. 이리저리 치이는 과정에서 신사업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의욕을 잃는다. 큰 것만 바라보다 작은 기회를 잃어버리는 이른바 대탐소실(大貪小失)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 큰 것이 영원히 유지될 수 없다면 내일을 위해 끊임 없이 작은 것을 준비해야 한다. 지금만 바라보고 사는 조직은 말 그대로 지금만 살게 된다. 내일이 없다.
과거의 성공 체험과 막강한 기존 사업의 논리가 조직을 망친 가장 극적인 사례는 아마도 코닥의 몰락일 것이다. 이 회사는 변화를 위한 충분한 자원과 시간, 그리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 자신들이 만들었던 필름 시장의 논리에 집착해 고객이 바뀌고 있는 것을 외면했다. 사실 거의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개발했던 것도 다름아닌 코닥이었다. 주력이던 필름 사업의 그늘에서 그것을 키우지 못하고 후발주자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겼을 뿐이다. 코닥이라는 엄청난 브랜드를 만든 것도, 그 브랜드를 역사에 남을 몰락의 사례로 만든 것도 다름 아닌 가장 먼저 필름 시장을 개척했고, 1등으로서 주도했다는 과거의 영광이었다.
● 몸을 묶는 촘촘한 이해관계
풍부한 자원과 경험을 지닌 기업이 변화를 몰라서 쓰러지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실행력의 부재, 즉 너무 많이 생각하고 적게 움직이기 때문에 실패할 때가 더 많다.
실행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는 조직 내부의 복잡한 이해관계다. 특히 오래된 기업일수록 해묵은 이해관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그것이 걱정과 잔소리의 탈을 쓰고 실행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은 조직의 연령이 높아지면서 조직 내 정치의 부정적인 영향이 커지고, 이해관계 대립도 심해지면서 조직이 경직되고 변화에 소극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전문가 집단과 관리 스태프들은 온갖 위험과 불안요인을 지적하며 통제를 바짝 조인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기득권을 지닌 사업의 견제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 내의 암투와 정치가 변화를 억누르는 경우도 있다. 노조, 주주 및 지역사회 등 수 많은 이해관계자(stakeholder)들이 모두 자신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며 변화와 새로운 시도에 대해 각자의 목소리를 낸다.
물론 이런 목소리 중에는 귀담아 들어야 할 것도 많다. 또한 성숙한 기업이라면 다양한 이해관계를 잘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기업들이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조율의 과부하를 겪으면서 실행력을 잃는다. 다양한 입김을 모두 반영해 새로운 시도를 하느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속 편할 수도 있다.
생각이 곧 실행이 되는 가볍고 빠른 스타트업들이 활개를 치는 시대다. 한 목소리를 내며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도 모자랄 상황에서 눈치를 보며 내부를 조율하고 설득하는데 쓰는 에너지가 크다면 시장에서 싸울 힘은 점점 줄어들 수 밖에 없다.
4. 젊음을 유지하는 기업의 비결
이제까지 조직의 노쇠현상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시장에는 나이를 잊은 동안(童顔) 기업, 아니 나이가 들수록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기업도 적지 않다. 조직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그들에게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 안에서 안되면 밖에서 혁신
기업의 변화는 결국 끊임 없이 새로운 사업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굳어 버린 시스템과 기존 사업의 기득권 속에서 새로운 사업이 뿌리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기존의 관리를 전부 뒤엎거나, 불확실한 신사업을 위해 기존 사업을 팽개칠 수는 없다.
관점을 바꿔보는 것이 방법일 수 있다. 안에서 안되면 밖에서, 섞기 어렵다면 따로 가져가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꼭 현재 조직의 울타리 안에서 신사업이 커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기존 조직의 논리와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신사업을 시도하는 조직을 만들어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일종의 혁신 실험실을 운영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별동 조직을 활용해 신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중 GE가 신사업의 유연한 추진을 위해 2014년에 설립한 자회사인 ‘퍼스트빌드(FirstBuild)’는 특히 주목할 만 하다. 이 회사는 다양한 원천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새로운 제품을 창조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인터넷 공모 등 주로 외부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소규모 공장에서 신속하게 제품화한다. 그리고 대규모 유통망이 아닌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등을 통해 시장에 선보인다. 가볍고 신속한 개발과 시장 테스트를 꾀하는 것이다. 최근 개발해 판매한 음료수용 제빙기의 사례를 보면, 단 4개월만에 구상에서 제품화까지 성공했고, 비용도 기존 GE 내 개발 과정을 따랐을 때에 비해 20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기존 조직에서는 상상조차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저렴하게 개발한 것이다.
이 회사는 지난 4월에 외부 전문가들을 초빙해 33시간동안 기존의 가전제품을 개량해 혁신하는 이른바 해커톤(hackathon : hacker + marathon)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페이스북 등 주로 혁신적인 기업과 스타트업의 상징과도 같았던 해커톤을 제조업에서 크게 연 것이다.
작년에 문을 연 퍼스트빌드가 1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산업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 있는 GE의 재무 성과에 기여하는 정도는 미미하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혁신 마인드에 미치는 영향만은 결코 작지 않다. 어쩌면 GE가 퍼스트빌드를 독립시켜 움직이는 진짜 이유는 이 회사가 내부 구성원들을 자극해주길 원해서인지도 모른다.
● 작지만 확실한 변화 이유 부여
혁신과 관련된 오해 중 하나는 급격하고도 전면적인 변화가 좋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판돈의 전부를 거는 식의 큰 변화는 극적일지 몰라도 그만큼 위험하다. 조직에 무리를 줄 것이 불 보듯 뻔하고, 실패했을 때의 타격도 크다. 물론 시기를 놓쳐 어쩔 수 없이 모험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위험 속에 뛰어드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장수기업들은 균형잡기의 명수다. 안정과 변화를 섞는 자신만의 황금비율을 알고 있다. 멍하니 멈춰 있다가 등을 떠밀려 모험에 뛰어들기보다는 작은 변화를 꾸준히 추구해 조금씩 자신을 바꾸어 간다. 요란스럽게 변화를 외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다. 그들은 정중동(靜中動)을 실천한다. 그들에게 변화는 어쩌다 한 번 보여줘야 하는 떠들썩한 쇼(show)가 아니라 생활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장수기업들은 스스로에게 변해야 할 이유를 계속 제공한다. 반드시 큰 변화일 필요는 없지만, 변화를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수필에서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요소로 이른바 ‘작지만 확실한 행복(小確幸)’들을 꼽았다. 젊게 사는 기업들은 스스로에게 작지만 확실한 변화의 이유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듀폰(DuPont)은 2010년부터 매출액의 30% 이상이 최근 4년 내에 만들어진 혁신에서 나와야 한다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목표의 달성 여부를 외부에 지속적으로 공표한다. 또한, 이 목표의 실현을 위해 지속적으로 신사업 개발과 사업 포트폴리오 개편에 힘쓰고 있다. 상대적으로 변화가 빠르지 않은 산업에서 변화를 향한 열망을 잃지 않도록 지속적인 자극을 하는 것이다. 1800년대 초 화약회사로 시작해 ‘Fortune 500’에 속한 제조업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회사가 된 것에는 이처럼 꾸준하고 확고한 변화 의지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 고객과 함께 변화
고객에게 선택 받을 수 있어야 젊은 조직이다. 매력적이고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고객에게 경쟁력 있는 가격에 제공한다면 그 조직은 젊다. 반면 그럴 능력을 잃었다면 수명을 다한 조직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꾸어 말하면 오랜 기간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 고객의 변화를 끊임 없이 읽고 거기에 맞춰 왔다는 의미이다.
변화는 목적이 아니다. 고객에게 더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새롭게 뜨는 산업을 따라다니며 그때그때 변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역량 없이 새로운 산업에 뛰어드는 것은 운동 선수들이 종목을 바꾸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 막연히 수익성을 따라다니다 한 때의 유행에 그치고 말았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고객의 변화를 쫓아야 한다. 오래된 산업 내에서도 고객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제공한다면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95개국에서 4,200개 이상의 호텔 및 리조트 체인을 운영하고 있는 힐튼 월드와이드(Hilton Worldwide)의 시작은 1919년이었다. 최근 이 회사는 호텔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어 보일 수도 있는 고객의 변화, 즉 스마트폰 사용에 주목했다. 그리고 머물 객실을 사전에 직접 고르길 바라는 고객의 욕구와 스마트폰 사용을 결합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이 회사는 최근 스마트폰 앱을 통한 서비스를 본격화하고 있다. 멤버십에 가입한 고객들은 이 앱을 통해 미리 마음에 드는 객실을 직접 고르고, 사전에 체크인까지 할 수 있다. 내년부터는 열쇠를 수령하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바로 객실 문을 여는 스마트키 기능까지 추가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제 고객은 객실 배정과 열쇠 수령을 위해 프론트 데스크에 줄을 서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숙박업이라는 전통적인 자기 사업의 논리가 아닌 스마트폰 사용자로서의 고객의 변화에 집중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으로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 지속적인 다이어트는 필수
오래 살아남은 기업들은 몸이 가볍다. 가볍다는 것은 작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래되고 큰 조직이라도 날렵하다면 몸이 가벼운 것이고, 작아도 의사결정과 실행이 느리다면 무거운 조직이다. 세상이 변하는 것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조직은 곧 사라진다. 노쇠한 조직은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군살이 붙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랜 기간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조직들은 군살을 덜고 균형 잡힌 조직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힘을 기울여 왔다.
군살 덜기를 꼭 인원 감축 등 인력 구조조정으로 좁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물론 과다한 인력의 조정은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시스템 자체의 군살 빼기다. 효율적이지 못한 시스템을 그대로 두고 사람만 줄인다면 조직에 과부하가 걸려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과도한 절차나 통제, 필요 이상의 위계 등 조직의 신속함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대상으로 군살을 빼고, 거기에 맞춰 인원을 조정하는 것이 순서이다.
GE의 전설적인 경영자 잭 웰치는 회사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바꾼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CEO에 취임하고 맨 처음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관료주의와의 전쟁(War On Bureaucracy)’이었다.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지 않고는 그 어떤 변화도 성공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회사의 위계 조직을 9단계에서 4단계로 줄여 의사결정 속도를 높이고, 경영자들이 현장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관료주의에 물들었던 회사를 빠르고 적응력이 뛰어난 조직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전례 없음’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
어떤 조직이 젊은 조직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모른다. ‘전례(前例)가 없다’는 말을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노쇠의 길에 접어든 회사에게 전례가 없는 일은 하면 안 되는, 할 수 없는, 굳이 할 필요 없는 골치 아픈 일이다. 그러나 젊고 활기찬 회사는 다르다. 그들에게 전례 없는 일은 곧 새로운 기회와 도전거리를 뜻한다. 그들은 아마 아직 아무도 걷지 않은 첫 눈 위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남길 기회를 얻었다 여길 것이다.
노화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온다. 사람과 달리 무한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기업은 더욱 그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장, 고객, 사업의 변화를 바라보는 조직의 눈과 마음이다. 변화에 마음이 설렌다면, 나이와 관계 없다. 그 조직은 젊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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