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경제연구원 '하이얼, 거대 공장을 벤처 인큐베이터로'
하이얼 사업 방식의 핵심은 '유연성'에 있다. 벤처 인큐베이터와 같은 조직 시스템, 제조업과 데이터의 결합, 외부 역량의 능숙한 활용 등 어떠한 환경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체질을 지향하는 것이다. 한국 제조업 역시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 못지 않게, ‘어떻게 사업하고,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와 같은 사업 방식 측면의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국 가전 기업 하이얼(Haier)의 사업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하이얼은 지난 1월 GE(제너럴 일렉트릭)의 가전 사업을 54억 달러에 인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스웨덴 가전 기업 일렉트로룩스(Electrolux)가 33억 달러에 GE 가전 사업을 인수하려던 계획이, 미국 법무부의 반독점 규제에 막혀 무산된 지 1개월 만에 발표된 내용이다. 토머스 에디슨으로부터 비롯된 GE는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브랜드다. 아직 미국 정부의 최종 승인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중국 가전 기업이 M&A를 통해 글로벌 가전 시장의 중심에 상륙하게 되는 역사적 이벤트로 볼 수도 있다.
하이얼은 지난 2015년 11월에도 세계 경영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경영학계의 오스카(Oscar)상으로 불리는 Thinkers50에 하이얼의 장 루이민 회장이 선정된 것이다. Thinkers50은 2년마다 세계 경영학 구루(Guru) 50인을 선정한다. 경영학 비전공자들에게도 익숙한 마이클 포터(Michael Porter)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 교수와 같은 이들이 상위권에 등재된다. 장 루이민 회장은 2015년 38위에 선정됨과 동시에 Thinker50의 우수 성과상인 ‘이념 실천상(Ideas into Practice)’도 수상했다. 경영학 이론을 실제 기업 경영에 도입하여 혁신적인 성과를 창출해냈다는 의미다.
중국 제조 기업을 단지 정부 지원을 통해 급성장한, 저가의 품질 낮은 제품만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치부할 수 있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글로벌 제조업, 체질 혁신이 필요한 시점
하이얼의 사업 방식을 살펴보기에 앞서, 글로벌 제조업의 환경 변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적으로 저성장 기조가 지속되면서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제조업의 위기를 논하고 있다. 지멘스, GE와 같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구 제조 기업들은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에 집중하고 있고, 소니, 샤프와 같이 기술력으로 승부하던 일본 기업들은 대대적인 조직 슬림화를 통해 위기 극복을 시도하고 있다.
최근 제조업이 겪고 있는 위기의 원인은 다양하다. 지금까지 글로벌 생산지 기능을 제공했던 신흥국의 임금 수준이 높아지고 있고, 제품의 유통 방식이 온라인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추세도 제조업 특유의 저마진 사업 구조를 위협하는 요인들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제조업을 둘러싼 주변 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전처럼 모두에게 통용되는 보편적 기능의 제품을 만들기만 하면 팔리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냉장고, 세탁기와 같은 필수 가전 제품은 이미 대부분의 가정에 보급되어 있다. 스마트폰 시장도 2015년 성장률이 한자릿수로 떨어지는 등 정체되는 모습이다. 반면 Dyson, Balmuda와 같이 감성적 아이디어, 디자인으로 차별화하는 브랜드가 뜨고, GoPro와 같이 특정 마니아층과 호흡하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생겨나고 있다. 소비자들의 니즈가 파편화되는 다품종 소량화 시대에 들어서는 모습이다. 중앙 집중형의 거대한 조직 구조를 통해서는 소비자들의 니즈에 대응하기 점차 어려워질 수도 있다.
글로벌 ‘제조 분업화’도 중요한 환경 변화 요인이다. 과거에 비해 물리적 ‘공장(Factory)’의 중요성은 점차 약해지고 있다. Foxconn, Pegatron과 같은 전문 제조 기업들의 사업 규모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MMI(Manufacturing Market Insider)에 따르면 2014년 상위 50개 위탁 전문 제조 기업 매출이 2,650억 달러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Foxconn은 70개 정도의 공장을 운용하면서 애플, 샤오미, 소니와 같은 기업을 대상으로 위탁 생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의 산자이(山寨) 생태계는 30일 만에 모바일 제품 출시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진다. 누구나 아이디어만 있으면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오히려 내재화된 대규모 생산 인프라가 제약 요건이 될 수도 있는 환경이다.
또한 ICT 시대가 도래하면서 제조업은 무한 융합(Convergence)을 경험하고 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와 같은 OS플랫폼이 디바이스 속성과 밀접히 결합되면서, 이제는 제품의 하드웨어 사양에만 집중해서는 경쟁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고 있다. 스마트TV는 방송, 게임과 같은 콘텐츠 사업자와의 협력이 필수 요소가 되고 있고, 냉장고, 세탁기와 같은 가전 제품 역시 네트워크 사업자나 시큐리티 사업자의 스마트홈 플랫폼과 연동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제조 기업 관점에서 전통적인 협력 대상과 전선(戰線)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 변화는 제조 기업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무엇보다 과거와 같은 사업 방식으로는 점차 경쟁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다품종 소량화 시대에 맞게 상품 기획은 민첩해져야 한다. 제조 분업화 추세에 맞게 내부 조직 체계는 가벼워져야 한다. 무한 융합 시대에는 혁신적 오픈 이노베이션이 필수 역량이 될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기존의 체질이 바뀌어야 하는 시점이 도래하는 것이다.
하이얼 사업 방식의 특징, ‘유연성’
하이얼을 성공적인 기업으로 볼 수 있을까. 여기에는 여러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 홍콩 증시에 상장된 Haier Electronics, 그리고 상하이 증시에 상장된 Qingdao Haier 두 법인의 매출을 합하면 2014년 기준 250억 달러 규모에 이른다. 합산 영업이익률은 5.9% 수준이다. 규모와 수익성 모두 글로벌 가전 사업자에 뒤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매출의 상당 부분이 중국 내수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Casarte와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업 영역이 중저가 제품군이라는 점은 분명히 하이얼의 약점이다.
물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2000년대 초반 짐 콜린스가 소위 ‘위대한 기업’으로 분류한 기업들 중 상당수도 이미 몰락했거나, 지금 위기를 겪고 있다. 하지만 향후의 지속적인 성장 여부를 떠나, 지금 하이얼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이얼이 앞으로 펼쳐질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유연한 체질, 사업 방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① 거대 기업에 벤처DNA를 이식
하이얼은 분명 거대 제조 기업이지만, 마치 벤처 인큐베이터와 같은 조직 운용을 통해 내부의 창의력을 높이고, 상품 기획의 스피드와 유연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하이얼은 원래 전형적인 관리형 경영 시스템을 통해 성장한 회사다. 장 루이민 회장이 취임한 1984년 당시 하이얼은 최소한의 근무 기강도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근로자들의 무단 결근, 이탈은 일상적인 모습이었고, 날씨가 추울 때는 일부 근로자들이 작업장 커튼을 임의로 뜯어 불을 피우는 데 쓰기도 했다. 장 루이민 회장은 엄격한 통제를 통해 이를 개선해나갔다. 화장실 사용법 등 기본적인 교양, 행동 양식에 대한 교육을 강도 높게 추진했고, 성과가 안 좋은 직원은 별도의 자아 비판용 발판 위에서 일을 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매일 1%씩 생산량과 품질 향상을 달성한다는 하이얼 특유의 OEC(Overall Everyday Everything Control and Clear) 관리 시스템도 1984년 초창기에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하이얼은 어느 정도 제조 기업의 모습을 갖춰가던 1990년대 후반부터 경영 시스템의 변화를 시도한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조직의 유연성을 높여나간 것이다. 1998년에는 기존의 수직적 부서 체계를 수평적 사슬(Market Chain) 형태로 바꿨고, 2002년에는 모든 직원들이 기업가이면서, 회사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는 Mini Mini Company(MMC) 개념을 도입했다. 그리고 2005년 MMC를 보완하여, ZZJYT 시스템을 도입했다. 최근 세계 경영학계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하이얼의 ZZJYT 시스템이다.
ZZJYT 시스템은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무엇보다 높은 수준의 자율성을 통해 직원들의 동기를 최대한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누구든지 사업 아이디어와 열정만 있으면, 경영자에 준하는 역할과 권한을 부여 받고 주도적으로 사업을 수행할 수 있다. 아이디어가 있을 경우, 경영진을 대상으로 사업 PT를 진행하고, 그 아이디어가 타당한 것으로 평가되면, 10~20명 규모의 ZZJYT를 구성한 후 회사로부터 사업에 필요한 예산을 배정 받는 방식이다. ZZJYT는 언제든 결성, 해산이 자유로운 팀제로, 상품 기획, 기술 개발, 영업 등 다양한 전문성을 지닌 인력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사업 수행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 받는 동시에, 사업 성과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 급여조차도 사업 성과에 연동된다. 사업이 성공적으로 운영될 경우 별도 회사로 Spin-off도 가능하다. Spin-off 이후에는 하이얼과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ZZJYT는 강도 높은 내부 경쟁을 통해 유지된다. ZZJYT 리더는 초기 필요한 인력을 하이얼 내부 인력 시장(Internal labor market)을 통해 직접 채용한다. 역량, 경험, 인성이 검증된 직원들은 자연히 더 좋은 조건으로 중요한 ZZJYT에 영입된다. 그렇지 못한 인력들은 일을 구할 수 없거나, 부가가치가 낮은 ZZJYT에 배정될 수밖에 없다. ZZJYT 리더 역시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각 ZZJYT 내부에는 차기 리더 후보인 Catfish가 지정된다. ZZJYT 멤버들은 언제든 투표를 통해서 기존 리더를 교체할 수 있다. 또한 각 ZZJYT 간에도 경쟁이 있다. 특정 ZZJYT가 자체적인 아이디어로 사업을 수행하는 도중이라도, 새로운 멤버들이 해당 아이디어를 통해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계획이 통과되면, 기존 ZZJYT는 해산되고, 새로운 멤버들로 ZZJYT가 만들어진다.
회사 내의 각 부서들이 철저한 시장 원리에 의해 협업한다는 점도 특이한 사항이다. 물류, 구매, 생산, 영업 부서들은 시장 가격에 근거한 ‘내부 가격’에 따라 각 ZZJYT와 거래 계약을 맺는다. 가령 생산 부서는 일정 수준의 품질, 수율, 납기를 충족한다는 조건으로 사업 ZZJYT와 납품 계약을 맺는 방식이다. 만약 내부 생산 부서의 품질, 수율 기준이 미흡하다고 판단될 경우, ZZJYT는 적극적으로 외주 생산을 활용하도록 권유 받는다. 이는 매출, 수익성 등 모든 사업 성과에 대해 ZZJYT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모든 거래 활동이 가격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에, 어떤 부서든지 최종적으로는 재무 성과를 통해 평가 받게 된다. 일반적인 기업의 R&D 조직처럼 순수 비용 부서(Cost center)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얼에서는 회사가 직원들에게 어떤 작업을 어떻게 수행할지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 개개인이 자율과 창의를 기반으로 혁신을 찾아 나선다. 회사 안에 또 하나의 자유 경쟁 시장이 존재하는 모습이다. 하이얼은 현재 6만명 규모의 직원을, 전체 2~3천개의 ZZJYT에 배정하여 운용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거대 제조 기업에 창의성과 민첩성을 불어넣는 하이얼만의 방식이다.
② 데이터, 네트워크로 고객과의 거리를 좁혀간다
하이얼은 제조 기업이지만 데이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데이터와 네트워크를 통해 고객과 상시적으로 소통하고, 제품의 가치를 높여 나간다. 장 루이민 회장은 궁극적으로 지구상의 모든 사물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환경에서는, 단순히 제품을 만들고 판매하기만 하는 기존의 제조업 방식으로는 차별화된 가치 제공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이얼의 사내 슬로건 중 하나가 “The Information is more valuable than the product”일 정도다.
하이얼은 이미 2010년 무렵부터 회사의 모든 사업 활동, 시스템, 인력들이 고객과 데이터를 통해 연결되는 Networking-Company를 지향하고 있다. 하이얼의 Water purification 사업도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업 모델을 고도화하고 있는 사례다. 우선 하이얼의 전문 상담원들이 중국 각 지역을 방문하면서, 인근 지역으로부터의 수질 오염 물질 유입을 차단하는 필터를 설치해준다. 환경, 수질 오염 문제가 심각한 중국의 특성 상 이러한 서비스를 거절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이얼은 필터를 통해 축적된 각 지역의 수질 오염 데이터를 지역 주민들과 공유하면서, 해당 지역의 환경 문제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정보들을 얻는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여 해당 지역의 환경에 최적화된 수질 관리 솔루션을 지역 기관에 제공한다. 소비자로부터 얻은 데이터를 활용해서 새로운 B2B(Business to Business) 사업 기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스마트 가전 사업에서도 유사한 접근법을 확인할 수 있다. 고객이 하이얼의 스마트 가전을 구매하면, 설치 기사가 제품을 고객 댁내에 설치하면서, 필수적으로 네트워크를 통해 제품을 인터넷에 연결해준다. 이후 해당 가전에서 나오는 시그널을 모니터링하다가, 이상이 감지되면 고객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상담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고객의 제품 사용 행태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들을 얻는다.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정보들은 하이얼의 하이엔드 브랜드인 Casarte의 상품 기획에 활용된다.
하이얼은 생산 현장에도 네트워크를 적극 융합하고 있다. 하이얼은 현재 중국 각지 4개의 무인화된 스마트 공장을 통해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온수기 등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의 글로벌 제조업 트렌드인 Industry4.0과 궤를 같이 하는 모습이다. 하이얼은 Industry4.0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2011년부터 무인화 기반의 스마트 공장 개념을 전개해왔다. 하이얼의 스마트 공장은 많이 알려진 지멘스, GE 등의 사례와는 약간 다르다. 단지 무인화나 자동화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을 직접 생산 프로세스에까지 관여시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PC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자신이 구매한 제품이 생산되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다. 그리고 직접 생산 과정에도 참여한다. 가령 자신이 주문한 냉장고가 하이얼의 스마트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즉석에서 냉장고 문의 색상이나 선반 개수 등을 변경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제품 생산이 완료되면 배송 경로도 직접 결정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과정은 무인화된 로봇과 프로세스를 통해 진행된다. 소비자가 직접 공장의 설비와 소통하면서 물건을 만드는, 미래형 다품종 소량 생산 제조업의 일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이얼 외에도 많은 제조 기업들이 데이터와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말한다. 하지만 이를 자사의 사업에 실제 접목시키는 속도와 수준은 모두 다르다. 향후 제조업의 사업 모델에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얼은 오히려 변화를 주도함으로써 잠재적인 위협 요인을 최소화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2014년 애플의 스마트홈 플랫폼 홈킷(HomeKit)이 공개되었을 때, 글로벌 가전 기업 중 가장 먼저 플랫폼 제휴사로 참여한 것도 하이얼이었다.
③ 내재화된 오픈 이노베이션 역량
하이얼은 오픈 이노베이션에도 매우 적극적이다. 이번 GE 가전 사업 인수 계획을 통해 하이얼의 개방적이면서도 과감한 사업 방식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사실 하이얼은 창업 이후 지금까지, 명분보다는 실리의 관점에서 외부 역량을 적극 활용해온 회사다. 장 루이민 회장은 취임 이후 회사 역량을 높이기 위해 선진 기업과의 결합이 필요함을 절감했고, 1985년 독일의 가전, 장비 제조 기업 Liebherr와의 JV(Joint Venture)를 성사시킨다. 이후 Liebherr의 기술력, 경영 방식에 감명을 받아 1992년 회사명을 JV 사명이었던 Qingdao-Liebherr에서 Haier로 변경했다. 그 외에도 하이얼은 일본의 Mitsubishi, 네덜란드 Philips, 이탈리아 Merloni 등 회사의 기술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누구와도 기술 제휴, JV 방식으로 협력해 왔다.
하이얼은 M&A에서도 오랜 경험을 쌓아 왔다. 1990년대 들어 주력 사업이던 중국의 냉장고 시장이 포화될 조짐을 보이자, 하이얼은 사업 확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M&A를 전개한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20개 이상의 기업을 인수하면서 TV, 오븐, 전자레인지, 컴퓨터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당시 하이얼의 M&A 전략은 소위 ‘기절한 물고기 소생시키기(Buying stunned fish)’로 표현된다. 기술력과 장비는 보유하고 있지만, 경영 역량이 취약한 기업을 인수한 후, 하이얼의 경영 시스템을 도입해 회사를 정상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하이얼의 인수 대상은 중국 내수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2005년에는 월풀과 함께 미국 가전 기업 Maytag 인수전에 참여하기도 했고, 2011년에는 JV 형태로 운영하던 일본 가전 업체 Sanyo를 인수했다. 2012년에는 호주 가전 기업 Fisher&Paykel을 인수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지금의 하이얼은 외부 역량과의 결합에 노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이얼은 얼마 전 상하이 증권거래소를 통해 향후 GE와 ‘Light Integration’을 지향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통상적으로 기업 간 인수 합병 초기에, 비용을 절감하는 Cost 시너지에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하이얼은 GE의 사업 자산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두 회사의 제품/지역 포트폴리오, 유통 결합을 통한 매출 시너지를 높이는 데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두 기업의 문화와 철학은 적극 융합하되, 경영진과 인력은 철저히 현지화한다. 장 루이민 회장은 과거부터 하이얼 경영진이 피인수 기업을 직접 경영하는 것은, 중국 레시피로 서양 요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밝혀 왔다. 이와 같은 운용 방식은 지금까지 하이얼이 시행한 여타의 M&A 사례들에서도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다. Sanyo와 Fisher&Paykel은 지금도 현지 팀에 의해 독립적으로 경영되고 있다. Fisher&Paykel은 7명의 임원 중 5명이 현지인으로 구성되어 있을 정도다.
하이얼은 외부의 제휴 대상을 자사 고객들과도 긴밀히 연결시킴으로써 오픈 이노베이션 효과를 극대화한다. 하이얼의 기술진, 제휴사, 제휴 학교들은 하이얼의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 HOPE(The Haier Open Partnership Ecosystem)를 통해 하이얼 고객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혁신을 만들어간다. 고객들이 제품에 대한 불만 사항을 설명하면, 하이얼의 외부 제휴사들이 HOPE를 통해 고객의 목소리를 직접 확인하고, 개선 방안을 하이얼에게 먼저 제안하는 방식이다. 2014년 출시된 스마트 에어 솔루션 Air Cube는 HOPE에 등록된 128개 사내외 전문가 단체가 전세계 980만 명의 소비자와 함께 소통하고, 협업하면서 탄생한 사례다. 2014년 기준 20만 개의 단체, 개인이 HOPE에 등록되어 있으며, 매년 1,200개 수준의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가 HOPE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
급변하는 환경에서는 외부 역량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것이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하이얼의 행보가 주목받는 또 하나의 이유다.
한국 제조업, ‘유연성’이 필요한 시점
경쟁이 치열해지는 글로벌 제조업 환경 속에서, 많은 제조 기업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경쟁사가 따라오기 힘든 부품, 산업용 솔루션과 같은 B2B 사업 영역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하기도 하고, 아예 제조업에서 벗어나 소프트웨어 사업으로 체질을 전환하는 IBM과 같은 기업도 있다. 이러한 모습들과 비교할 때 하이얼의 차별점은 분명하다. 포트폴리오를 전환하거나 제조업에서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사업 영역은 유지하되 사업 방식의 혁신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벤처 인큐베이터와 같은 시스템을 통해 조직의 잠재력을 극대화하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외부 역량을 활용한다. 또한 데이터와의 결합을 통해 제품의 가치를 높인다.
한국 제조업 역시 위기 극복을 위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매력적인 사업 영역으로의 포트폴리오 전환도 중요하다. 하지만 제조업 환경 자체가 예측 불가능한 형태로 변하고 있고, 중국과 같은 신흥국 제조 기업들이 대부분의 산업에서 한국과 기술 격차를 줄여가는 상황에서는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어떻게 사업하고,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와 같은 사업 방식의 혁신도 필요한 것이다. 특히 한국 제조 기업들은 대체로 중앙 집중형 의사결정에 익숙하고, 외부 기업과의 제휴, 인수 합병에는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이얼의 사업 방식은 제조업의 변화 방향에 대한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업 방식을 혁신하는 동력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하이얼의 ZZJYT 시스템은 강도 높은 내부 경쟁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 내부 직원들의 저항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장 루이민 회장의 철학과 신념이 밑받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 루이민 회장은 사내에 ZZJYT 시스템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이해시키면서, 회사가 적자를 보는 경우가 있더라도 ZZJYT가 분명히 유지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혁신의 관건은 실행이고, 이는 상당 부분 경영진의 역할과 철학에 영향 받을 수밖에 없다.
경영에는 하나의 정답만이 있을 수는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무한 경쟁 시대에 후발 사업자들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한 성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언제 어떠한 환경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춘 기업은 그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끝>
'■ 경제보고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픈 이노베이션이 진화하고 있다 (0) | 2016.03.04 |
---|---|
◎세계경기 둔화와 통화정책 한계 노출로 글로벌 금융리스크 더 커졌다 (0) | 2016.03.03 |
◎저유가에도 저탄소 경제 성장탄력 여전 (0) | 2016.02.26 |
◎중국 전기차, IT 기업의 성공 신화 재현하고 있다 (0) | 2016.02.25 |
◎IoT, 경쟁의 핵심을 바꾼다 (0) | 2016.02.23 |